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폴폴 Apr 08. 2022

사랑이라 말 못 하는

<어쨌든 사랑>: 디뮤지엄


선생님은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서 답을 들어보자고 하셨다. 질문은 하나여도 답은 각자의 얼굴만큼 다른 단어의 정의를.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의 정의를 말해야 하는 순간은 손 좀 씻고 올게, 라고 말하고 그길로 바다로 떠난 사람처럼 급작스러웠다. 네 꿈과 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채근하는 애인처럼 곤혹스럽기도 했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순서가 가까워 올수록 초조해졌다. 그 단어는 나한테, 물건을 떨어뜨려도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끝 모를 협곡처럼 깊고 무거운 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이 뭐냐면,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저마다의 사랑이 용감하거나 수줍게, 깜빡깜빡하는 전등처럼,  창문처럼, 물이나 공기나 밥처럼, 일상적이지만 사는 데 꼭 필요한 것들로 호명됐다. 내 사랑은, 언어의 얼굴이 아니어서 입으로 불러올 수 없는 내 사랑은 어디 있는 걸까.


선생님이 던지신 건 사랑의 일부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사랑의 모든 것, 모두의 사랑. 지구에 살면서도 지구 전체를 본 적 없는 내가 우주에 나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지구를 말단 말인가.


그 단어는 내게, 발음되는 순간 그 말을 들은 사람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당위를 가진 말이다. 나 하나 돌보는 것도 서툰 때다. 좋아하는 사람한테도 못한 말을 모르는 사람 수십 명 앞에서 설명해야 하다니. 순서는 시시각각 다가오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떤 말이라도 해야 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떠올랐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있는데, 질투나 이별이나 배신 같은 건 사랑을 둘러싼 것이지 사랑이 아니라던 한강 작가의 말도. 아닌 것을 걷어내면 본질에 가까워지겠지만, 그것만으로 지구의 내핵에 접근하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의 회로는 다시, 한 사람을 성장하게 한 <데미안> 속 사랑에서 시작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속 질문에 다다랐다.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살 수 있어요?


읽고 보고 들은, 머리와 가슴에 박힌 사랑의 사료들을 샅샅이 훑던 나는 결국, 기억의 수면 위로 뚜렷이 떠오른 한 장면을 묘사하기로 했다. 그 자리의 우등생이 되겠다는 포부 같은 건  없었으니 누군가 피식 웃거나 한숨을 내쉬더라도 견딜 각오를 했다.


사랑은... 그 사람이 버스에서 머리를 부딪치며 자고 있을 때 부딪치는 자리에 자기 손을 대고 있는 거예요.


언젠가 단막극에서 본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저게 사랑이구나, 생각했었다.(단막극은 소설을 영상으로 만든 것이고, 소설의 제목은 <은비령>이다.)


선생님은 어떤 대답을 듣고는 뒷이야기를 궁금해하셨고, 어떤 대답은 추가 질문 없이 그냥 넘어가셨다. 그러면서 작가가 되려면 사랑이 뭔지 한 마디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사랑의 자리에 어떤 단어를 넣 고민이 깊어지는 건 다. 슬픔이 뭔지, 전쟁이 뭔지, 그리움이이별, 기쁨이 뭔지 오래 생각한 사람 답에 가까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한 단어를 오래 생각하다 면, 단어 하나를 제대로 말하기 위해 살아온 날을 다 뒤져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려면 자주, 다른 생각이 돋아나도록 뽑아 버린 것들이 저 혼자 싹을 틔운 말의 숲을 헤매야 한다. 숲을 빠져나오면 숲의 물기에 젖은 얼굴로 트램펄린을 타게 된다. 겪어본 적 없는 높이까지 몸이 튀어 오르면 먼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을 따라가는 연기에서 밥 짓는 사람의 등이 떠오르면, 그 등이 노을과 함께 돌아올 발걸음을 기다리는 중인 걸 기억해 낼 수도 있고.


모든 국은 어쩐지

괜히 슬프다


왜 슬프냐 하면

모른다 무조건


슬프다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너무 슬퍼서


고깃국은 발음도 못하겠다


고깃국은......


봄이다, 고깃국이



                                                - 슬픈 국, 김영승



발음도 못하겠는 사랑을 데리고 숨은 곡선이 많은 고개다. 꾸준히 걷느라 종아리에 근육이 붙은 사랑이 굽이굽이 고개를 무사히 넘는 데 안도하며. 어쩌면 그렇게 헤매고도 사랑이란 말을 등에 써 붙이고 사느라 영원히 사랑의 정면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사랑과 한몸이어서.


발음할 때마다 마음 한 조각을 내놓는 기분이 드는 단어가 사방에 걸린 전시에 간다. 내 등을 나 못 보열심히 다른 사람의 뒷모습 찍다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 켜진 밤 창마다 걸려있다. 깜빡이다 켜진 창에서 흘러나오는 밥 짓는 냄새. 그집을 잃어버린 사람도 가지고 있는, 사랑의 주소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 오는 날의 피크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