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고 있어도 감은 것보다 더 깊고 진한 어둠이었다. 빛이 있는 곳에서 눈을 감았을 때 느껴지는 따뜻한 색깔과 느낌이 다 지워진 공간이 지구에 있다니. 나는 우주복 없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에 던져진 것처럼, 세상에 처음 나온 짐승의 새끼처럼 두려워하며 감탄했다. 몸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니 점도 선도 면도 없는 차원의 세계였다. 땅이나, 바다나, 숲의 가장 깊은 데서 건진 침묵만 모아 만든 어둠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입구에서 받은 스틱은 안전상의 이유로 수직으로만 짚어야 했는데 짚은 자리를 어차피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어 그냥 팔목에 걸고 돌아다니기로 했다.
운은 시작할 땐 뒤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 오른쪽이나 왼쪽, 대각선이나 앞에 와 있었다. 나는 운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어디 있어? 자꾸 물었다. 대답을 듣고 나면 깊은 심연이던 어둠이 별을 다 지운 하늘, 새로 별을 달기 직전의 깨끗한 밤하늘이 되었다.
어떤 커플과 운과 나, 길을 안내하는 로드 마스터, 다섯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둠 속의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우리가 나고 자란 곳부터 지금 머무는 곳까지 흩어져 존재하는 조각들을 조금씩 가져와 완성시킨 모습이었다. 저마다의 얼굴만큼 다른 색과 속도를 가진 마을. 어둠 속에, 다섯 개의 다른 마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시작은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꽃과 나무 냄새가 나는 숲이었다. 숲을 나온 우리는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을 지나 소리가 울리는 동굴을 통과해 화가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만져 보기만 하고 어떤 그림인지 맞히는 건 어려웠다. 그림에는 울퉁불퉁한 촉감만 있었다. 색도 형태도 스토리도 짐작할 수 없어서 다 새로 그려야 했지만 만지는 순간, 완성된 그림이 확실히 거기 있었다.
티켓 부스가 있는 역에서 릭샤를 타고 시장에 갔다. 시장에서 과일과 인형과 신발을 만져볼 때쯤엔 어둠에 익숙해져서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바리스타가 내 준 음료를 마실 때는, 빨대를 음료수 팩에 못 꽂아 헤맸지만.
빨대 못 꽂겠어.
이거 먹어.
말이 끝나자마자 운이 빨대를 제대로 꽂은 팩을 내 쪽으로 밀었다. 운과 나는 만난 지 얼마 안 됐고, 그때까지 가까이 앉아본 적도 없었다. 빨대를 꽂은 팩을 밀어주는 것만으로도 감동받을 수 있는 사이라는 뜻이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로드 마스터가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 같냐고 물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공간, 우주나 바닷속이나 자신의 안쪽에 가라앉아 있느라 각자의 몸을 통과한 시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통과한 시간은 실제 흐른 시간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운도 나와 똑같은 시간을 말했는데, 그건 우리가 같은 걸 느끼며 그 길들을 지나왔다는 증거일 수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운은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운의 손은 한 번도 내 손 가까이 있지 않았다. 그 머루 같은, 아니 머루 씨앗이 잠겨 있는 깊고 깊은 땅 밑 같은 어둠 속에서 혼자 적외선 안경을 쓴 것처럼 어찌 그리 잘 피하는지.
내 손은 자주 로드 마스터한테 붙들렸다. 혼자 엉뚱한 데 가거나, 의자를 못 찾거나, 방향을 몰라 벽에 못처럼 붙어 있을 때 왈츠를 추는 박자로 이끄는 그 손 말고는 믿을 게 없었다. 운이 나를 잡아 주었으면, 했지만 그도 어둠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 중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설마... 태초에 가까운 그런 시간 속에서도 신사였던 걸까.
한 번은 어떤 손이 오랫동안 내 손을 잡았고, 급기야 나를 잡아끌어 옆에 앉히려 했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손이었으니, 커플 중 여자 손이 분명했다. 그녀는 내가 미안해하며 손을 빼자 깜짝 놀라,
어딨어? 너 어디야?
애타게 남자 친구를 불렀다. 머무는 동안 들은 가장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 저 커플은 내내 손을 잡고 있어서 서로를 부르지 않고도, 헤매지 않고 자리를 잘 찾았구나. 운과 나는 스칠까 봐 극도로 조심하느라 여전히 각자도생 하는 중이었다.
로드 마스터의 부드럽고 서늘한, 적당히 살집 있고 매끄러운, 정확한 위치로 나를 안내하는 손에 의지할 때마다 운의 손을 생각했다. 어둠은 어느새 손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렇게 손을 원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태어나려는, 꼬물거리는 무엇처럼 간절히 감각의 입구가 되어줄 손을 기다렸다.
그러다 불쑥, 운이 나를 오해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체험 전시의 중요한 부분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걸 손잡고 싶은 마음으로 오해하면 어쩌나. 아니, 처음엔 아니었지만 이제 정말 그걸 원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오해를 부인할 수도 없겠다. 그때쯤 나는 손이 열쇠라, 손 없이는 열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 공중에 새기는 것처럼 한 글자 한 글자 와서 박히는 목소리. 박혀서 영혼의 일부가 되는 어둠과 스칠 수 있는 수백 번의 가능성이 무색하게 한 번도 스치지 않은 손. 사이좋게 허방을 짚으며 허적허적 걸어가는 밤하늘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목소리와 손만 걸려 있는 그 하늘에서 우리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진 별, 만나려면 하나가 폭발한 파편으로 상대에게 닿을 수밖에 없는 두 개의 애달픈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