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아오이를 보면 내가 떠오른다는 사람이 있었다. 아오이는 예쁜 사람은 아니었다. 말이 없고, 표정도 말만큼 없고, 닫힌 서랍처럼 조용해서 누군가 노크할 때까지 거품으로 뒤덮인 욕조에 가만히 담겨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억울한 일이 생겨도 소란한 소명보다 조용한 오해를 택하는 사람. 시간이 흘러도 낡지 않고 하루하루 익숙해지기만 하는 기억을 가진 사람이었다.
표정이 지워진 얼굴엔 어떤 감정도 새것처럼 담긴다는 게 맘에 들었다. 그래서 냉정도 열정도 다 지나간 길에, 언젠가 두오모 성당에서 만나잔 약속을 받아 걸어 놓았다. 날짜를 정하지 않은 두 사람이 거기서 해후할 확률은 길을 가다 우연히 피렌체행 비행기표를 주울 확률만큼 낮을 거란 사실은 모르는 척했다.
예상보다 일찍 피렌체에 가게 된 건 당시 하던 공부 때문이었다. 나는 세상의 변수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촛불이었고 피렌체에 모인 학생들은 다양한 나라에서 야망을 갖고 출발한 청춘들이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사강이 떠올랐다. 오래 들여다봐 익숙해진 프랑스 사람의 얼굴이 그 얼굴뿐이라 그랬을 것이다. 짧은 커트 머리에 꼬마처럼 싱글거리는 눈, 밉지 않은 앞니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녀가 하루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미 둘씩 짝을 이룬 방에 엑스트라 베드를 하나 들여야 했다. 베드는 내가 머무는 방에 놓였다. 그녀는 침대 발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거절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네스야. 넌?
이네스가 오기 전, 처음 만난 사람과 한 침대에서 자야 했던 나는 통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떤 브랜드 좋아해?
명품 거리에 아직 안 가봤다고, 왜?
만나자마자 쏟아진 질문들에 답하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프랑스 유학생은 어떤 느낌이야? 라는 질문에 가난한 느낌이야, 라고 대답해 버렸다. 뒷얘기를 물어보면 예술과 낭만과 사랑을 말할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난, 가난이라... 단어를 곱씹는 그녀의 얼굴이 혼자만의 세계로 건너가는 걸 나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처음보다 더 어색해진 상황이라 자다가 팔로 그녀를 치기라도 할까 봐 신경이 곤두섰고, 몸을 뒤척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잠을 설쳤다. 아침에는 처음 잠든 모양 그대로 일어났다. 사정을 모르는 그녀는, 너처럼 얌전히 자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내 수면 습관을 칭찬했다. 네 덕에 없던 습관이 생겼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환한 얼굴, 깊게 자고 개운하게 일어난 얼굴이었다.
악수를 한 첫날 이후 이네스는 내 아침까지 챙겼다. 아침은 안 먹는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김이 올라오는 홍차와 빵 앞에 앉게 되었다. 이탈리아 빵 파네토네는 여러 가지 과일 조각이 박힌 빵이라 씹는 부위마다 맛이 다르다. 이네스는 지금 어떤 과일을 씹고 있는지 말하며 웃곤 했다. 나도 같은 부분이라고 답하면 눈을 크게 뜨고 기뻐했다. 이네스의 앞니가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두오모 갈래?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
오늘 만나기로 한 거야?
날짜는 안 정했어, 언젠가 만나면 거기서 만나기로 한 거야.
이네스는 군말 없이 함께 두오모 앞까지 가주었다. 비슷한 사람은커녕 한국인 관광객도 못 보고 돌아오던 길에 휘파람 소리 나는 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그날 바람 속에서 와플을 먹고 나서, 그 뒤로도 자주 와플을 먹었다. 꿈처럼 검고 꿀처럼 단 초콜릿이 바람이 지나간 흔적처럼 뿌려진 와플이었다. 깃을 세운 트렌치코트가 아니라 와플을 들고 우리는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절은 대로변 모퉁이를 돌 때마다 현악기를 든 지망생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이면 도착까지 세 시간이나 남은 기차를 기다리는 환승객의 마음이 됐다. 가뿐한 어깨로 기지개 켜듯 늘여 보는 유연한 분위기. 비 오기 하루 전 구름처럼, 준비가 다 끝나서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기분.
어리석은 깔깔깔 볼래?
그 말은 자기 전에 시트콤 같이 볼래, 라는 이네스 식 표현이었다. 어리석은 것도, 깔깔깔 웃는 것도 좋아하는 것들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와 침대 사이 협탁에 올려놓은 노트북에서 이야기가 재생되면 줄거리랑 상관없는 수다를 떨었다. 이네스의 언어도, 나의 언어도 아닌 노트북 속 언어는 밤바람을 배경 음악으로 가진 먼 나라 말이었다. 얼굴을 보기 힘든 또 한 명의 룸메이트는 언제나 늦게 들어왔다. 그제야 침대에서 뒤척이며 잘 수 있게 되었다.
평상복으로 꽉 찬 트렁크에서 가장 평상복과 거리가 먼 옷을 꺼내 입고 서로의 매무새를 살핀 날이 있었다. 머리는 이렇게 하면 어때? 단추를 다 잠그는 건 아닌 것 같아. 다른 옷은 없어? 그런 말을 하며.
우리에게 어떤 기대가 있었을까. 그날의 외출은 당연히 우리 각자의 연인들에게 비밀이었다. 분위기만 보고 오자,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에게 그런 말을 하고 나서 열댓 명의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어느새 이네스도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이탈리아어로 말을 거는 사람들 때문에 이탈리아 말 못 해요, 되풀이하던 나는 세게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무리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꺼내 준 사람은 이네스였다. 우리는 어둠과 음악과 낯선 사람이 가득한 곳을 뒤로하고 인적 드문 길을 걸었다.
와플 먹고 싶어?
응.
지금은 늦어서 문 연 데 없어. 내일 먹자.
못 먹는데 왜 물어봤어?
너가 이 길 지날 때마다 와플 먹고 싶어 해서.
피자집과 젤라토 가게와 어쩐지 와플을 하나씩 숨겨둔 것 같은 창문을 차례로 지나 매일 밀고 들어가는 묵중한 문 앞에 다다랐다.
어리석은 깔깔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시트콤은 좋은 거구나, 살아온 날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도 같은 데서 웃게 하니까.
이네스의 벌어진 앞니가 예뻐 보여 나는 울컥했고, 눈물이 날까 봐 고개를 돌렸다. 취기가 실린 바람은 눈물과 웃음의 순서를 헷갈리는 경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