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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Jan 21. 2022

오늘 날 찾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중경삼림>


샤오롱바오를 그림으로 만난 건 만화가 조경규의 <오므라이스 잼잼>이라는 만화책에서였다. 그 책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한창 열심히 볼 땐 만화에 나오는 음식을 먹어야 하루가 다음날로 넘어갈 정도였다. 만화는 어떤 맛이든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 먹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대부분 아는 맛이었지만 도통 기억에 없는 맛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샤오롱바오다. 소롱포라고도 불리는 작고 뜨거운 만두, 만두 맛집에서 너무 많은 종류를 한꺼번에 먹는 바람에 맛의 특징을 잊어버린 만두.


오래 기다려 입장한 식당에서 홍콩식 솥밥과 꿔바로우, 우육면과 샤오롱바오를 주문했다. 가장 기대한 건 샤오롱바오. 숟가락에 푹 파묻힐 만큼 앙증맞지만 방심하면 연하고 무른 혀를 다치게 할 만큼 뜨거워서, 얕보면 앙 물어버리겠다는 표정 하고 있다. 젓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육즙을 먼저 먹고 나머진 한입에 넣는 게 순서라지만, 육즙을 다 먹어버리면 뒤이어 먹는 만두 맛이 평범해진다. 물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지만, 역시 육즙과 소를 한번에 먹고 싶다. 고기 맛이 진한 만두소보다, 얇고 찰진 만두피보다 빛나는 주인공은 육즙이니까. 어느 쪽을 베어 물든 뜨거운 환영의 인사처럼 주르륵 흐르는 즙이 없다면 소롱포는 그저 평범한 고기만두다. 즙과 고기와 쫀득한 반죽을 동시에 씹으며 순간을 최대한 오래 음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한자가 적힌 포스터와 병 코카콜라 사진이 있는 실내는 단순해서, 그 단순함이 오히려 낯선 곳의 분위기를 풍겼다.


가본 적 없는 홍콩이 그리워졌다. 홍콩 사람들은 이런 걸 먹는구나, 생각하니 시끌벅적한 방언이 날아다니는 식당 구석에 앉아 다음 메뉴를 고민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다.


홍콩 영화에 대해서음식과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제목과 대사를 하도 들어서 본 적 없는데 여러 번 본 것처럼 선명한 영화. 이제 와 보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영영 미루게 된, 나한테만 미개봉작인 명작들.

JTBC <방구석 1열>은 꼬박꼬박 챙겨보지 않지만,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드는 프로그램이다. 뻔한 기는 다 빼고 몰랐던 부분을 해줘서, 학구적인데 재밌기까지 한 영화판 알쓸신잡 같다. 그날은 박상영 작가가 나와서, 홍콩 영화 이야기를 마음껏 해서 즐거웠다며 끝인사를 다. 작가의 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에서 등장인물들이 홍콩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친해진 부분이 떠올랐다. 이제영화를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 간 김에 서핑을 배우겠단 생각이 든 것처럼, 뜬금없지만 당연한 결정이란 느낌이 들었다.


홍콩은 매력적인 전학생 같은 도시다. 말을 걸어볼까 싶다가도 적당한 타이밍을 놓쳐서 인사한 적은 없는. 홍콩 음식을 먹고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나니,  말없는 전학생이 건넨 인사를 받은 기분이다. 그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알아보려고 작정하니 홍콩 영화에 등장한 장소와 건물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눈에 띈 청킹맨션 사진은 홍콩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은 증명사진 같았는데, 영화 <중경삼림>을 거기서 촬영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왕가위 감독이 다른 영화를 찍다 쉬어가는 기분으로 2주 만에 가볍게 찍었는데 뜻밖에 큰 사랑을 받았단 내용과 함께.


2주면  바꿀 수 있는 시간일까. 몸무게를 얻거나 잃는 시간, 머리칼의 길이나 색을 바꾸는 시간, 콩나물을 키우거나 친구와 집을 바꿔 살 수 있는 시간.

14일은 외국어를 마스터하거나 피겨 스케이팅의 기본자세를 익히기엔 역부족인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기타 코드를 익혀 생일 축하 노래를 연주하거나, 두발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우기엔 충분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2주가 내 앞으로 배달된다면 포장을 풀기 전에 먼저 심호흡을 하고, 그 탐스러운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낭비할지 생각할 것이다. 중경삼림 같은 역작을 함께 만들 동료들 없이 혼자 가를 해야 한다면 역시 글을 쓰는 게 좋겠다.


아침엔 어슬렁거리며 낯선 동네를 한 바퀴 돌아야지. 오늘 벌어진 봉리가 있나, 이파리 색이 달라진 나무가 있나 살핀 다음 해 드는 쪽에 잠깐 앉아 있을 것이다. 뜨거운 걸 한 잔 마시고 나선 점심때까지 글을 쓰고. 이야기는 머릿속에 그득그득 차 있어서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기만 해도 흘러나올 테니 그걸 화면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점심을 먹고 나선 동네에 하나뿐인 극장에 가야지. 거기선 흑백 영화를 볼 것이다. 여행지에서 흑백 영화를 보면 낯선 공간에 낯선 시간이 겹쳐져 모르는 시절로 이동한 실감이 나겠지.

다른 길로 우연히 들어서면 작은 시장 입구가 보일 텐데, 뭘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 호떡이랑 무화과를 사서 돌아올 것이다.


"오늘 날 찾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라고 말하며 삐삐를 버린 <중경삼림> 속 금성무처럼 폰도 없이 돌아다녀야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머리칼을 쓰다듬어서 잠깐 책상에 엎드리면 파도 소리가 어제보다 은근해 스르르 잠이 들 테고, 그러면 정말 멀리까지  보람이 있을 것이다. 시계랑 인터넷은 없는데 책이 많은 카페랑 생선 파는 시장, 낙서 많은 떡볶이집은 있는 마을. 파도 소리가 벨소리인 방마다 혼자인 사람들이 들어 있어서 거기선 각자의 외로움이 조금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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