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태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함께 천 번의 태양을 볼 수 있을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천 편의 영화는 같이 볼 수 있어.
천 편을 보려면 일주일에 한 편씩 본다고 해도 스무 해가 걸린다. 지금껏 본 영화가 몇 편인지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하듯 기분과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영화를 기억 속에서 불러올 수는 있다. 이젠 내가 이야기 중독이라는 걸 인정할 때가 된 셈이다.
영화 속에서는 밟아보지 않은 땅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도, 피해 갈 수 있는 사건도 없었다. 책과 영화는 어떤 부분이 무척 닮았는데, 현실이 아무리 들이치는 장대비라도 종이와 화면에서 한번 마른바람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축축한 시간은 멀리 보낼 수 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그렇다고 좋을 때 이들을 외면한 건 아니다. 지나가는 날이 상쾌한 여름밤 같을 때는 몇 권의 책을 동시에 읽거나 여러 나라의 드라마를 동시에 조금씩 봤다. 시간이 없을 때는 운동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면서 보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국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뭔가를 보는 중인 형편이 되었다.
불을 끄고 밤의 한가운데서 '안경'의 시작을 기다렸다. 깊은 밤 속에서 건져 올린 영화의 장면들이 다 부드럽게 환했다.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금 기억하는 '안경'은 밤의 모습이 한 장면도 없는 영화다. 낮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잊은 사람에게 낮을 찾아주려는 것처럼, 영화는 낮이 고요한 가운데 뭉근히 으깨지는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걸 과장 없이 보여준다.
안경은 팥빙수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빙수는 과일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여름에 먹고 싶은 음식이라, 과일과 빙수만 있으면 너끈히 여름을 날 수도 있다. 여름 한낮의 모든 페이지를 다르게 채울 정도로 많은 추억이 담긴 음식이기도 하고. 친해진 사람과는 꼭 팥빙수를 먹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어도 빙수만큼은 각자 먹고 싶은데, 1인 1빙을 하자고 하면 대부분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냐, 난 빙수 별로 안 좋아하니까 하나만 시켜서 나눠 먹자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음식에 관한 나름의 철학과 고집이 있긴 해도 입밖에 내는 편은 아니어서, 어떤 음식을 어떤 방법으로 먹든 대부분 상대의 의견에 따른다. 그래도, 팥빙수를 먹을 때만큼은 얼음이 소복한 놋그릇 하나에 잘 닦인 스푼 하나씩만 놓고 싶다.
이렇게 섞어 먹는 거야, 하면서 취향을 묻지도 않고 모든 재료를 섞어 버리면 울고 싶은 심정이 되지만 눈치 못 채게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팥과 부드러운 얼음을 조금씩 따로 먹다가, 어느 정도 재료의 맛에 익숙해지면 둘을 나만의 비율로 섞어 먹고 싶다. 부재료 없이 그저 팥과 얼음으로만 이루어진, 아니면 생과일과 얼음으로만 이루어진 빙수를 느긋하게 즐기고 싶다. 다붓한 산보처럼.
영화에서 팥빙수가 나오는 장면만큼 시원한 장면은 없다. 일 년에 단 며칠, 팥을 손수 끓이러 섬에 할머니가 오시면, 팥빙수 가게가 문을 연다. 기둥과 지붕만 있는 오두막이 가게다. 팥과 얼음으로만 이루어진 팥빙수처럼 심플한 공간이다.
안경처럼, 내가 사랑한 이들이 콧잔등 위에 걸치고 있던 그것처럼, 가게가 문을 열면 팥빙수는 섬의 콧잔등에 걸린 안경이 된다. 팥빙수를 들고 앉아있기만 해도 바다나, 시간이나, 자신의 마음이 더 잘 들여다보이게 되니까.
아침엔 바닷가에서 체조를 하고, 점심엔 그날의 재료로 밥을 차려 먹고, 오후엔 말없이 빙수를 먹는 섬.
그때 먹는 빙수는 바다 너머의 계절이거나, 모서리를 다 없애고 눈이 된 얼음이거나, 생각에 잠겨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시간이다.
이런 연유로, 영화에 나오는 놀랍도록 멋지고 숨도 못 쉬게 환상적인 장소들을 다 제치고 그 섬이 오늘 가장 가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그런 바다, 그런 빙수, 그런 사람을 각각 따로 만난 적은 있지만 모든 게 합쳐진 순간은 만난 적 없으니까. 그 바다에 가게 되면 손에 받쳐 든 빙수가 다 녹아 흐르기 전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바다는 <안경>에 나오는 바다랑 닮았다.
안경이 뭐야?라는 질문이 들려오면,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야지.
처음부터 끝까지 안경 쓴 사람만 나오는 영환데,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안경을 안 쓴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안경 이야기는 아니고, 팥빙수 이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