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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Mar 02. 2022

디어 루시

<인사이드 르윈>


오랜 습관이 하나 있어요. 저를 스쳐간 말들 중 좋은 말은 사라지지 않게 모아두는 거예요. 소리가 아니라 글자로 오는 말도 있는데, 시간을 들여 찬찬히 읽고도 기억을 붙잡아 두고 싶을 땐 갤러리에 저장을 해둬요.

올해 들어 제가 모은 문장들은 자주, 루시 님에게서 온 것들입니다. 좋은 말을 들인 날은 꽃병에 깨끗한 물을 찰랑찰랑 받아둔 때처럼 흐뭇하고, 커피 머신에서 마지막 커피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따뜻한 잔을 잡을 때처럼 설레요.


우리가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해 다행이면서 슬퍼요. 많이 좋아하면 그런 마음이 들잖아요. 진짜 내 모습을 봐도 나를 처음처럼 바라봐줄까, 나의 초라하고 삭막하고 쌀쌀맞은 부분도 이해해줄까. 아니면 어쩌지, 진짜 나를 보고 놀라 도망가면 어쩌지.

평소엔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문제에 자유롭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한마디에도 깨지기 쉬운 마음이 되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 문장은 언젠가,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 들고 갈지 버릴지 모르겠는 검은 봉투처럼 제가 느껴질 때 용기를 내 안을 한 번만 들여다봐 달라부탁하는 수줍은 문장입니다.


저녁엔 라볶이를 먹고 <인사이드 르윈>을 보았습니다. 다친 사람의 마음에는 왜 아무것도 불어오지 않을까요. 바람이나 물이나 산책을 하고 싶은 기분 같은 건, 지금의 무거움을 고요함으로 바꿔주는 것들이잖아요. 르윈에겐 바람도 바다도 없어요. 가벼워지는 산책이 아니라 목적지로 가기 위한 걸음만, 그가 직접 옮겨야만 옮겨지는 무거운 몸과 기타이름을 모르는 고양이만 있어요.

꾸역꾸역 걸음을 옮기긴 해요. 존재조차 몰랐던 자신의 아이가 살고 있는 도시로 못 가고, 무례한 사람들에게 무례함을 되돌려 주면서. 소심한 반항을 할 때보다 훨씬 더 자주 참고 기다리고 망설이면서, 어딘가로 내내 향하긴 해요.


그런 르윈의 여정에는 쉴 새 없이 담배 연기를 뿜거나, 지팡이로 툭툭 치거나, 바닥에서 자라고 하거나, 이틀 후 여자 친구가 오니까 방을 비워달라는 사람들만 연이어 등장했다 사라지죠. 그에게 슬픈 건 기타를 잃어버리는 일이었을까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자각이었을까요, 아니면 저작권료를 포기한 노래만 메가 히트를 는 일이었을까요. 르윈을 보다가 루시 님이 떠오른 건 이 말 때문이에요.

언젠가 친구에게 넌 언제 내가 생각나? 라고 물었을 때 들은 대답이에요.


날씨.

날씨? 날씨가 어떨 때? 맑을 때, 흐릴 때, 비 올 때, 눈 올 때?

전부 다. 날씨가 어떻든 너가 생각나. 오늘 날씨가 어떻구나, 생각하면 그 뒤에 항상 너가 생각나.


친구가 곁에 없는 지금 말은 저한테 매일의 날씨 같은 문장으로 남아있어요. 좋은 영화를 봤을 때나 아닐 때나 내가 내 마음에 들 때나 아닐 때나,

루시 님 마음에 말풍선 같은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어요. 아무한테도 안 들리는 혼잣말인데 통하는 사람한테는 반드시 읽히는 말풍선 속 글씨처럼요.


다른 계절이 시작돼도 지우지 않고 남긴 플레이리스트처럼, 오래 입어 흐물흐물해진 티셔츠를 버리지 못하는 마음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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