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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Apr 03. 2022

 당신은 나인가요, 알렉스

<조용한 희망 MAID>


안녕, 알렉스.

는 당신을 꼬박 아홉 시간 동안 지켜봤어요. 당신에게서 도망가며, 당신에게로 빠져들며, 당신과 나의 다른 점을 찾으애쓰며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당신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사실이에요. 가느다란 손가락이나 머리를 하나로 묶었을 때 드러나는 얼굴형이나 망설임과 용기가 동시에 깃든 눈동자 얘기가 아닌 건 잘 알 테죠. 떠나야 할  떠나지 못하는 사람을 분연히 일어나게 하고, 세상의 문을 못 여는 사람 앞에 놓인 창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당신이 아름답다는 뜻이니까요.


한글 제목 '조용한 희망'은 알렉스, 당신 그 자체일 거예요. 당신은 조용한 사람이죠. 너무 조용해서 화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당신의 분노는 높고 빨라지는 억양이나 새된 소리, 무언가 깨지고 다치는 순간이 아니라 아이를 안고 조용히 빠져나가는 낡은 집의 뒷모습까요.


당신과 나는 많은 것이 달라요. 당신은 나보다 어리고, 인내심이 많고, 감정에 매몰되지도 않죠. 하지만 우리는 닮은 밤의 풍경을 갖고 있어요.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공책을 펼치고 펜을 깨물며 고민하는 존재라는 점이요. 가족한테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낯선 이한테는 세 문장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이요. 돈이나, 먹을 것이나,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차가 없어 울 때, 끝까지 혼자만 운다는 점이요. 한없이 친절하고 좋은 사람,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일수록 기어이 잃는다는 점이요. 그리고 이게 무엇보다 닮았는데,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다 걸 수도 있다는 점이요.


이건 내 작은 비밀이에요.


당신이 처음 혼자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만난 사람은 문 뒤에 서서 그렇게 말했죠.

질끈 감고 싶은 눈처럼 망설이는 표정으로 문이 열리자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찬 물건들이 보였어요. 집의 모든 공간이 창고로 변해버린 그 장면을 봤을 때 숨을 흡, 들이쉬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때도 당신이 포기하지 않을 걸 알았어요. 당신은 더한 것들이 쌓이고 굳은 시간 속을 스스로 빠져나온 사람이니까요. 머리에 두건을 둘러쓴 망설임 없는 표정이, 햇빛 들어오는 환한 거실의 장면으로 그 일이 끝날 거란 걸 말해줬으니까요. 집을 되찾은 의뢰인은 말하죠.


전 온라인 호더 모임 회원이에요. 우리 모임 사람들한테 당신을 소개해도 될까요?


호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는 사람. 그래요, 당신과 나는 호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안물건을 쌓아두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쌓아둔 감정이 많은 사람이요. 감정이 아닌 것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은 모조리 잃어버리기만 하는 당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건 매디뿐이죠. 곱슬거리는 머리칼과 분홍색 뺨을 가진, 천사 같은 매디. 매디를 안고, 핸드폰도 가방도 없이 먼 길을 걸어 나온 당신의 운동화를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울 수 있지만, 울지 않으려 해요. 당신을 보고 우는 건 나를 보고 우는 거니까요.


사람들은 조용한 사람에게 단번에 호감을 느끼지 못해요. 무시하거나, 몰라보거나, 외면하죠. 외모도 목소리도 성격도 조용한 당신은 꼭 할 말만 하고, 거의 안 먹고, 꾸준히 닥치는 주변의 문제들을 열심히 해결하느라 바빠요. 해결하는 것만으로 세월이 다 가고, 그렇게 당신이 웃는 날이 오지 않을까 봐 점점 마음이 조여 오지만, 그래도


쯤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어요. 장마철에 잘못 빤 이불처럼, 장롱에 넣지덮지도 못하고 물기를 짜도 짜도 눅눅 당신의 하루를 견디게 하는 건 뭘까요. 혼자 바라본 세상이 담긴 노트처럼, 만나는 사람에게서 그 사람만의 책을 발견하는 눈처럼 꿋꿋이 포기하지 않는 힘은 뭘까요.


첫 번째 이야기를 보다 중단했을 땐 당신을 다시 만나는 게 망설여졌어요. 당신을 화면 뒤로 넘기고 그냥 잊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제대로 화낼 줄도, 당연한 걸 요구할 줄도 모르고 말없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당신을 보는 게 괴로웠거든요. 그런데 왜 당신을 계속 만났냐고요?


당신은 나니까요. 당신이 일어나야, 푹 자고 세수를 하고 신선한 아침을 먹은 사람처럼 다시 시작하는 걸 봐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당신을 보 동안 자주 응원의 힘에 대해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이 나를 응원하는 마음이 될 수 있고, 응원과 응원이 모이면 다른 알렉스를 밖으로 나오게 할 수도 있다는 걸요.


매디가 좋은 어린이집에 들어갔을 때 당신은 춤을 추며 돌아다녔죠. 당신이 장학금을 받고 뒤늦게 대학에 가게 됐을 땐 소리 없는 눈웃음을 지었을 뿐이지만. 너무 짧은 그 순간, 당신이 스스로를 위해 웃은 그때, 는 순간을 잡아두고 싶었어요.


희망은 때로 너무 작아서 안 보이고, 뒤늦게 오고, 걷히지 않는 안개 뒤에 있는 집처럼 소문으로만 무성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스스로를 위해 춤출 정도로 선명한 희망이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오늘 하루 평범했다는 안심 발끝과 발끝을 스타카토로 이으며 뛰어가던, 어린 시절 그 길이 나타나 주면 좋겠어요. 그러니 우리 

다시 만나요, 그 길에서.


그때 우리는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서로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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