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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Feb 15. 2022

셔틀콕의 밤


지금 뭐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기분이 좋은데, 그 질문은 대부분 특별한 용무 없이 그저 당신과 연결되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날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발톱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먼 동네의 길들을 둘러볼 작정이었다. 그런 작정을 하긴 했어도 실상은 그와 반대였다. 오후가 되도록 잘 널어놓은 뺄래처럼 물기가 빠진 몸을, 거실에 놓인 벤치형 의자에 반듯이 펴서 뉘어 놓았던 것이다.


틈 사이로 희미한 바람이 드나들어서, 여름이면 집에서 가장 편하고 시원한 곳이다. 의자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찰만큼 좁아서, 똑바로 누워 하늘 높이 책을 쳐든 자세로 독서를 해야 는데 그 자세로는 몇 장도 읽기 힘들었다. 팔이 아파서 옆으로 누울라치면 책을 놓을 공간이 없고. 앉아서 읽으면 될 것을 몸을 일으키지 못해 책 읽기는 포기한 상태였다. 대신 음악을 틀어놓고 창문에 어룽거리는 나무 그림자에 리듬을 맞춰 보다 까무룩 잠들 수는 있었다. 얼음도 재우지 못한 한낮의 더위를 토닥이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몇 신데 아직까지 누워 있어?

곧 일어날 거야.(배고파지면.)

그럼 안 기다릴 테니까 여기로 와.


전화를 끊고도 한참 지나 밤이 제법 밤다워지면 우리는 배드민턴장에서 만다. 밤에 얼굴이 있다면 여름밤은 기다리느라 설레는 사람의 얼굴이겠지. 열에 들떠 상기된 로 느닷없이 환해졌다가, 끈적이는 살갗 온도가 위험하게 높아질라치면 어디선가 나타난 산들바람이 손등보다 먼저 이마의 땀을 닦아준다. 실컷 땀 흘릴 예정이라 낮에 널어 빨래 그대로의 매무새로 나왔어 운동화 끈은 잊지 않고 조인다. 대체로 어둑한데 어떤 부분만 문득 생각난 듯 밝은 코트에서 뛸 때 헐렁거리는 발만큼 곤란한  없으니까.


댕-

셔틀콕이 라켓에 맞는 느낌은 의외로 묵직하다. 셔틀콕에 딸린 열다섯 의 날개는 손바닥 위에 얌전히 놓여있을 땐 열다섯 겹의 꽃잎처럼 하늘하늘하다. 멈춰있을 때와 다르게 날아갈 때는 날개에 실린 바람의 무게만큼 무거워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라켓을 휘둘러 보면 얼마나 오래 셔틀콕 무게를 잊고 살았는지 알게 된다.


셔틀콕의 둥긋한 머리는 표정을 그려 넣기 직전의 달걀처럼 상상력이 풍부하다. 무표정의 얼굴온 힘을 다해 라켓에 부딪히는 순간, 수식어를 다 빼고 남은 부호처럼 집중한 눈빛 다음 시선이 는 데까지 날아간다.


깊은 잠의 계곡다녀오느라 적당히 지치고 늘어진 팔다리가 반 박자씩 느리게 휘청거린다.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짙은 관목 수풀 한가운데나 울타리 너머로 날개를 단 머리가 날아가도 한밤의 배드민턴 멤버들은 박자를 탓하지 않는다.


여어, 요오, 우후, 같은 추임새만 날개를 단 부지런한 곤충들처럼 날아다닐 뿐. 그럴 때 문장으로 이루어진 말이 없어도, 침묵 속에서 가장 속 깊은 말을 하는 게 스포츠라는 걸 알게 된다.


동네 주민, 업어 키운 막둥이, 열아홉에 만나 함께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올 때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연인, 그 연인의 언니와 누나로 구성된 우리는 낮의 그늘에서 그러모은 밤의 향기가 제대로 퍼질 때까지 그 여름을 쭉 짜서 흘린다. 점점이 흩뿌려진 밤이 혼자 짙어지느라 애쓰는 동안.


치는 법을 몰라도 건반을 연달아 누르면 소리가 난다. 그러다 우연이 만들어낸 음절의 높낮이와 속도와 기운이 한 곡을 완성하기도 한다.  한 번 연주되느라 어디에도 적히지 않은 밤이 플레이되는 동안 계절의 맨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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