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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폴 Jan 24. 2023

아카는 어디로 갔을까

<인공위성의 마음_ 김준현>


  두리번거리는 티를 안 내려고 벽을 보고 있을 때 아카가 나타났다. 아카는 어떤 책의 장인물 이름이라는데 책 제목은 잊어버렸어도, 그 이름이 그에게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는 기억한다. 아카는 모르는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회의실 공기를, 단번에 바꾸는 걸음걸이로 거기 들어섰다.


어찌나 씩씩하고 날랜 지, 일상생활에서도 경보 대회에 나가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후보 선수처럼 보일 정도였다. 두 팔과 다리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는 동작 멈, 장난스러운 눈썹이 빈자리를 찾 동안 꿈틀거렸다. 테이블 앞에 선 사람이 적당한 자리를 고르는 동안  그 사람의 시계를 보고 있었다.


유행과는 거리가 먼 시계였다. 비싸지 않아도 튼튼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재밌는 디자인으로 알려시계. 세계 어디를 가그 브랜드 시계를 찬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 시계만 봐도 닮은 취향 걸  수 있단 점에서 취향의 바로미터데도.


시계는 섬세하우아한 기호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시작되는 봄처럼 감출 수 없는 생기가 있었고 무채색 옷을 입은 사람도 총천연색으로 보이게 하는 기운이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손목에, 현실에선 아니어도 꿈속에 같은 마을 주민란 증표 보이는 시계를 찬 아카가 옆자리로 왔다. 나는 얼른 옆에 둔 가방을 치웠다. 두 손을 깍지 껴서 테이블 위에 올린 다음 주위를 재빨리 둘러본 아카 눈에도 내 시계가 보였을까. 보였을 것이다. 열일곱이 지났는데 그런 크레파스 색 같은 시계를 차는 팔목은 흔치 않으니까.


처음 만난 닮은 취향이 입을 열자 활기가 느껴지는 말투가 흘러나왔다. 빠르고 또박또박리듬 걷는 속도를 닮아 있었다. 낯선 이가 많은 데서는 입도 못 떼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나랑은 다른 사람이었다. 팔을 휘두르며 얘기할  신난 소매가 펄럭였다. 시계만큼이나 개성 있는 옷차림이었는데, 예쁘거나 멋있다고 하긴 힘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유연한 사람일 거란 확신을 주는 차림이었다. 사서 선생님이 등장해, 시작되는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고 나서 아카한테 눈인사를 했다.


오셨네요. 이 분은 우리 도서관에서

책을 제일 많이 대출하시는 분이에요.


모두 동시에 아카를 쳐다봤다. 이 모임의 리더는 정해졌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카는 누가 어떤 책을 말해도 책의 내용이나 작가를 알고 있어서, 독서 모임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읽는 일 말고 다른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책밖에 몰랐다. 그래서 새로 연 김밥집에서 머릿수건을 두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아카를 보며 나는 누구보다 감탄했다. 아카의 모든 동작에 왜 사족이 없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김밥집 앞에 있는 카페에서 둘만 모임을 기도 했다. 처음 십 분 정도는 책 얘기를 했지만  명이 사는 얘기를 시작하면 대책 없이 샛길로 빠졌다. 하루기어이 살게 하는 것들을 공유하면서, 채도 없는 풍경에 색칠하시간을 만들싶어한 게 우리 공통점이었다.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가끔 돌아봤고,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었다. 일하느라 시계도, 색을 바른 손톱도 서랍에 넣어 둔 서로에게 나긋나긋한 눈웃음을 보내면서. 웃는 눈이 고개를 돌리면, 그대로 멈춘 시간이 책갈피처럼 납작해 책장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손잡이와 잔의 커브가 우아해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야 는 카페에선 마주 앉아 아프리카 신생아를 위한 모자를 다. 더듬더듬 진도가 나가는 헝클어진 실뭉치를 자꾸 떨어뜨리면서, 앉은자리에서 휘리릭 모자 하나를 다 뜨는 손을 입 벌리고 바라다.


커피가 식고 케이크가 느린 속도로 줄어드는 동안 내 몫의 모자를 가져간 아카가 마무리 작업을 하면 가져간 책을 읽었다. 그럴 때 카페는, 아카가 주인인 고택의 응접실 같았다. 내가 간간이 고개를 들어 읽은 걸 띄엄띄엄 말하면, 아카는 빠르게 손을 놀리면서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다가 주석을 다는 식이었다.


 정리를 했다며 책을 몇 박스나 갖다 준 적 있었다. 차 트렁크에서 박스를 내리던 아카가 무릎을 심하게 찧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앞에서 찡그린 얼굴로 무릎을 열심히 문지르던 아카가 말했다.


오래 문지르면 괜찮아.

은, 혈액 순환이 안 돼서 피가 뭉친 거거든.


그 말을 들은 뒤로 어딘가 다치면, 친 부위를 지칠 때까지 문지르는 습관이 생겼다. 멍이 안 드는 건 잘 모르겠고, 문지를 때마다 아카 목소리가 떠오르긴 한다.


사진을 한 장 보준 적 있다. 어머니 집에 다녀왔다면서 내내 어머니 얘길 하길래, 어머니랑 구분 안 될 정도로 닮았어요- 했더니 눈이 커졌다.


우리 엄마 사진도 안 보고 닮은 건 어떻게 알아? 


아카 사진을 보고 스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어머니라 생각한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사과를 해야 하나, 모른 척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음 날아왔다.


어차피 엄마 사진 이거랑 똑같아.


그런 사람이라 좋아했다. 시계 같은 건, 안 찼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아니다. 시계는 포기 못하겠다. 시계가 필요 없는 시절에 시계를 찬다는 건 다른 액세서리를 거의 안 한단 뜻이고, 시계가 가진 중성적 매력에 충실하단 뜻이고,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고 움직여야 할 정도로 바지런하단 뜻이니까.


지금은 배터리를 갈지 않아 시간이 멈춘 시계만 서랍에 가득하다. 아카가 멀리 가서 연락이 끊긴 후로 독서 모임에 나가지 않다. 그런 사람을 모임에서 만날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이다. 다시는.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글썽이는 모든 것에 볕을

가라앉는 작은 것에 숨을


오래 문지르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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