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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깨작 Dec 10. 2022

7살 아들의 위로

아이러니한 휴가

“엄마 난 커서 엄마처럼 살고 싶어”

“그게 어떤 건데?”

“평범하게 사는 거”

“평범하게 사는 게 뭔데?”

“엄마처럼 가만히 책 보고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보는 거”

“엄마는 밥도 하고 빨래, 설거지도 하고 아빠랑 형아랑 너도 챙겨줘야 하는데?”

“그래, 나도 그거 할 수 있어.”

7살 된 둘째 아이가 최근 들어 나에게 종종 하는 이야기다.


결혼한 지 6개월 후부터 친정엄마는 8여 년간 세 차례 위암 진단을 받고 인간의 마지막 육체적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뒤, 서서히 꺼져 가다 엄마가 평생 사모한 하나님 곁으로 떠났다.


솔직히 우리 엄마는 한 오백 년 살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가 아픈 것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는 나를 돌봐주기에도 바쁜 사람이니까.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가 마지막 길을 떠날 때 차가워진 엄마가 들어있는 관 위에 떨리는 손으로 나는 썼다.

                                                  

               “내 엄마여서 고마워요"


신혼생활을 누릴 겨를도 없이 결혼생활의 많은 시간을 친정엄마의 투병에 신경을 써야 했으며, 두 아이가 태어났고, 난 맞벌이 중이었다.


그때는 모든 게 당연했다.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전세 사기를 당한 것도, 둘째 아이 100일을 앞두고 신랑이 갑상선 암이 림프절까지 다 전이되어 수술이 급하다 했을 때도, 피곤해서 걸을 수 없을 만큼 뒤꿈치가 아플 때도, 아이 육아로 계속 학업을 미루어야 했을 때도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다 감당해야 하며 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나를 원망했다. 지치는 것도, 버거운 것도, 힘든 것도 몰랐다. 그냥 그게 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떠나보낸 뒤 공허함이 몰려왔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은 죄책감이라는 감정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한 없이 가라앉는 내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 회피할 게 필요했던 나는 엄마를 추모하고 슬퍼하는 대신 그 시간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도피처로 택했던 임용고시는 1년 반 만에 운 좋게(?) 합격되어 공무원이 되었고, 또 운 좋게(?) 출근한 지 한 달 만에 질병휴직을 하게 되었다. 질병휴직 사유는 오래된 중등도 우울 에피소드와 번 아웃.


직장에서 책상에 앉는 것조차 버거웠던 나는 사직서를 내겠다 했고, 의사 선생님은 진단서를 건네며 휴직을 권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애 처음으로 공식적인 인생 첫 휴가를 보내는 내가 7살 아들 눈에는 좋아 보였나 보다.

휴직 후 첫날의 기록

일기를 뒤적이다 2년 전 썼던 이 글을 발견했다(감사하게도 지금은 거의 회복되었고,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도 생겨 이 글을 쓰는 중이다). 어느새 인가 마당에 핀 꽃을 보며 웃을 수 있고, 자라난 잡초를 정리하며 생명력에 감탄할 줄도 안다.


서귀포의 높고 맑은 하늘을 보며 두 아들과 구름모양 찾기 게임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여전히 휴직 상태이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내 감정으로 받아들이기 힘겨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엄마는 행복해 보이지가 않아, 엄마는 왜 안 웃어?, 왜 내가 엄마한테 말할 때만 나한테 말해?”라고 슬퍼하던 둘째 아이가 이제 나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 하니 감사할 따름이다.


엄마! 태몽까지 꾸며 그리 사랑했던 손주가 이제는 나를 안아주네.


엄마가 떠나기 하루 전날, 손주 생일이라니까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인지 ‘쯧쯧쯧’ 혀를 차던 엄마의 소리.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네.

달력에 손주 생일과 엄마 기일이 나란히 붙어 있으니 매년 함께 기도할게요.


엄마가 아끼던 7살 손주의 위로는, 또 다른 엄마인 나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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