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체험의 여로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 Constantine Cavafy
호산에 갔을 때였다. 삼척이라고 이름만 들어본 곳에서도 구석까지 내려가야 있는 호산. 여름의 한복판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온다는 핑계로 그곳으로 훌쩍 떠났다. 여행이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호산 터미널 승강장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일탈과 귀환의 전제로 이루어진, 여행이라는 그 가벼움이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터미널에는 모래인지 펄럭이는 쓸쓸함인지 모를 것들이 날리고 있었고 햇살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여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뿌옇게 익어가는 도로, 단층의 낮고 수줍은 건물들, 흙먼지 날리는 주유소. 농촌도 아니고 바닷가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일대를 간간이 누비는 굉음의 트럭들. 그 외엔 마땅히 풍경이라 부를 것도 없는 이곳. 그 누구도 ‘여행’ 오지 않을 이곳에는 ‘여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관광’은 더 큰 사치였다. 만약 이곳에서 내가 터를 잡아야 한다면? 나의 실존을 여기에 투기해야 한다면? 여행이라는 가벼운 마음가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때부터였다. 이름난 유원지에 가거나 별 가득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박물관에 가고 이건 누가 지었고 여긴 맛집이니 아니니 하는 여행은 세상의 껍데기를 훑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내가 삶을 쪼개 여행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무언가 본질적인 것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고개를 든 것은. ‘관광’에 무뎌질 만큼 오랜 시간 그곳의 삶에 녹아든 사람들의 숨결와 자연이 치열하게 부딪히는 현장, 때로는 두 주체가 감응하여 서로 호흡하는 그 현장에 내가 잠시라도 나를 던져놓을 수만 있다면, 그 막연한 의구심의 본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일부라도 발견해서 소박한 나의 삶과 견주어 보는 것이 나의 여행이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 ‘여행의 기술’, Alain de Botton
“세상을 넓게 봐라”, “국내에 머무르지 마라. 해외로 나가라”, “봉사활동이나 어학연수 같은 게 많이 있다” 등등 많은 이야기를 무심코 듣곤 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봉사활동이나 어학연수를 갈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다양한 장소를 여행하며 겪는 여러 경험들이 앞으로의 대화 소재가 되고 삶의 동력 등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비용과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어느 선택이 옳은 것인지 우열을 두지 말자. 해외에서 어학연수를 하든 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든 취직을 위해 공부에 전념하든 모든 것이 문학적 사유의 재산이자 술 한 잔의 안주거리가 될 테니. 얕고 넓은 경험과 깊고 좁은 경험, 넓이와 깊이를 각각의 축으로 삼아 수많은 점들이 좌표 상에 존재할 수 있다. 해외를 많이 다녀온 너도 내 삶을 살아보진 않았으니 그저 우린 다른 점에 놓여있을 뿐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경험할 수 없기에 경험은 그 자체로 유일하고 존귀한 것이다.
뿌연 잿더미와 흙으로 덮인 호산의 시멘트 바닥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사박사박 소리만이 정적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일정한 그 리듬을 따라 맥박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내 심장의 떨림과 함께하는 여행은 내가 살아온 삶과 그로 인해 지닌 사유를 각지의 사람들의 삶과 사유와 견주어 보는 일일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지각하고 인지하는 모든 객관적 존재들의 삶과 사유와 견주어 보는 일일 것이다. 모험심의 발동이자 탐험 의식의 발현이고 권태에 대한 반사작용 또는 방랑벽이라 불러도 좋다. 한국은 안된다며 이민이 답이라 외치고, 스위스에 3일 머물고 스위스가 한국보다 훨씬 낫다는 사람들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저울 한편에 두고 자신의 행복을 막연히 저울질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재 자신의 삶 속에서도 유일하며 존귀한 경험을 취할 수 있고 누구나 스스로 행복을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을 두 발로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앞으로 길을 비춰주어야 할 학생들을 위해, 방대한 삶의 총체를 짊어질 그들을 위해, 행복의 본질에 가까워지고자 소소히 노력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이 여정의 기록은 현실에 공고하게 자리 잡은 피라미드의 꼭대기부터 내려오는 가치들을 우러러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피라미드를 둘러싼 삶과 사유가 주는 행복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 소박한 여정이 되리라.
2016.08.10. 오후 1:37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