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에서 Aug 30. 2021

재택의 소리

문맥에 맞지 않는 글처럼

 여름 학기는 격주 대면 수업을 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확진자가 늘어서 대면 수업을 몇 번 못했다. 후반부 수업이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되어 재택근무가 길었다.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할 때는 수업이 끝나면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화상 수업 프로그램의 종료 버튼을 누른 후 입과 귀를 쉬게 한다. 몇 시간 동안 화면을 보느라 뻑뻑해진 눈도 잠시 감고 가만히 고요함을 즐기려고 할 때면 소리 들려온다.

 재택근무로 낮에 집에 있어 보니 생각보다 다른 집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아래층에서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 점심 먹었어? 우린 이제 먹으려고. 내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거든. 그래서 돼지 앞다리살 있잖아. 그거 굽고 있어.”     


맛있겠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다이어트 다음에 돼지 앞다리살이 이어져도 문맥에 맞는 건가? 접속사 ‘그래서’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에 저 말이 학생이 낸 숙제라면 나는 어떻게 고쳐야 할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했다.

첫 번째는 ‘내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거든. 그래서’까지를 삭제하는 것이다.     

, 저녁 먹었어? 우린 이제 먹으려고. 돼지 앞다리살 있잖아. 그거 굽고 있어.”

연결이 훨씬 자연스럽다.     


두 번째 방법은 단어를 교체하는 것이다. ‘돼지 앞다리살’ ‘샐러드’로 바꾸고 ‘굽고 있어’‘담고 있어’로 바꾸면 될 것 같다.      

, 저녁 먹었어? 우린 이제 먹으려고. 내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거든. 그래서 샐러드 있잖아. 그거 담고 있어.”

됐다.   

  

 요즘 내 일상도 문맥에 안 맞는 글이 되고 있다.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유튜브를 몇 개씩 본다. 밥 먹는 동안 하나 보려고 했는데 다음 편은 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보는 것이 허용되더니 그 다음에는 ‘앞의 것과 내용이 연결된다’, ‘가장 최근 업로드 동영상이라 봐야 한다’ 등의 이유를 대며 계속 본다. 이럴 때 평소에 없던 창의력을 발휘해서 이유를 만들어 내는 자신에게 놀라곤 한다. 광고가 안 나오는 유튜브 프리미엄을 써 본 친구가 너무 편하다며 추천해서 처음에는 솔깃했는데 광고라도 나와야 내가 계속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것 같아서 아직 안 쓰고 있다.     

 

 다이어트 중이라서 돼지고기를 먹는 것도 남일 같지 않다. 코로나로 집에만 있었더니 살이 쪄서 큰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마트에서 과자의 칼로리와 중량을 비교했다. ‘튀기지 않고 구운’ 같은 문구가 적혀 있는 과자 봉지 위주로 골라 치밀하게 비교한 후 선별해서 사 왔다. 과자를 안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초콜릿 묻은 과자들을 포기한 게 어디냐며 나를 대견해했다. 활동량이 적으니 그만큼 적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저녁밥을 덜어 냈는데 밤에 아이스크림을 뜯어서 덜었던 밥보다 더 많이 퍼 먹었다.      

    

 나만 이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랜만에 고향 선배 오빠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까마득한 옛날에 내가 소개팅을 해 준 것이 생각났다. 친구의 친구 중에 애교 많은 대구 여자애가 있었는데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인 선배와 잘 어울릴 것 같아 소개팅을 주선한 적이 있다. 그 소개팅은 잘 안 되었고 선배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사실은 자기 이상형이 ‘서울 여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선배는 자신이 40대가 되면 서울 직장 생활을 다 정리하고 귀농을 할 거라며 원대한 귀농 계획도 함께 들려줬다.

 그래서 두 번째 소개팅 해 주지 못한 걸로 기억한다. 내 주변에 서울 여자는 많았지만 이상형이 서울 여자인데 귀농이 꿈인 것은 예상치 못한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다이어트할 때는 돼지고기를 좀 먹어 줘야 하고 느끼하니까 아이스크림도 먹어야 한다.

바빠서 일할 시간은 없었는데 놀거나 쉴 시간은 생긴다.

이상형은 서울 여자지만 귀농이 꿈일 수 있고, 자상한 남자를 원하면서 남자다운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   


 말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민망해지면 '원래 다 그렇다, 사람은 이렇게 모순되는 면이 없으면 뭐랄까, 인간미가 없잖아.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다독인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그런지 글은 문맥에 맞아야 잘 읽히지만 사람은 문맥에 안 맞는 글 같아도 이해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