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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에서 감사향기를 맡다

by 하늘소망

수확의 계절이다. 하지만 나는 농사를 짓지 않으니 수확할 것이 없고 뜨거운 여름 내내 수고한 대가로 결실을 얻는 가을의 정서를 느낄 수도 없다.

그런데 비록 내가 농사는 짓지 않아도 거두는 것이 있다. 매주 찾는 동네 산에 5~6m 정도 되는 두 그루의 탱자나무가 있는데 그곳에서 샛노랗게 익은 탱자를 따거나 나무를 흔들어 떨어지는 걸 줍는다. 기껏해야 10~20개의 탱자이지만 줍는 양보다도 탱자를 주워 그 향기를 맡을 때 기분이 정말 좋다.

향기로 치료한다는 아로마테라피처럼 탱자의 그 향기가 나의 심신을 치유하는 것 같고 승용차 안에 넣어두면 꽤 오랜 기간 천연 방향제의 역할을 하고, 탱자향이 풍기는 승용차 안에서 운전을 하면 항상 상쾌한 드라이브가 된다.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 시에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는 시구가 있다. 소쩍새가 그만큼 국화꽃을 기다렸다는 의미로 내게는 다가오는데 이와 같은 정서가 탱자를 기다리는 나에게도 있다. 4월이 되면 앙상한 가시나무에서 다섯 개의 작고 가녀린 하얀 꽃잎이 달린 꽃이 피고 얼마 후 지고 나면 꽃이 떨어진 자리에 아주 작은 탱자가 달려있다.

그곳을 지나며 조금씩 커가는 풋풋한 탱자를 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가을의 노란 탱자가 그려진다. 탱자가 커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즐거웠기에 봄을 거쳐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될 때까지의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함이 아닌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기대감이 익어 노랗게 변한 탱자를 볼 때 희열감으로 승화된다.

산에서 따온 탱자를 만끽하다 보면 조금씩 탱자가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밝고 샛노랗던 색깔은 거무스름하게 되고 상큼한 향도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딱딱하고 검게 말라버린 둥근 형체만 남는다.

그때 나는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원래 있던 산으로 보내준다. 그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 줬던 것에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 시에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구가 있다. 누군가에게 유익이나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로 내게는 다가오는데 비록 사물이지만 탱자는 내게 행복한 향을 가져다준 감사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탱자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줄 때 감사의 마음이 되새겨지는 것 같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차 안에 넣어놨지만 이젠 그 향을 소진해 버린 탱자와 이별할 시간이 다가온다.

다시 상큼한 향과 밝은 노란빛으로 만나기까지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겠지만

탱자 향기의 여운이 감사함으로 계속 남아있기에 그 기다림이 행복하고 탱자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주는 것도 아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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