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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서울구치소

by 하늘소망

요즘 대통령이 구속되어 탄핵 심판 법정에 다니기 때문에 TV뉴스에서 법원에 가고 오는 경로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서울구치소 진입로 정문이 자주 나온다. TV화면으로는 정문까지만 볼 수 있고 그 너머에 있는 구치소 건물이나 교정시설의 상징처럼 보이는 높은 담장은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그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약간의 궁금증이나 호기심은 있겠지만 그곳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죄를 지어서 가든 면회하러 가든 그곳에 기분 좋게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곳에서 복역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서울구치소 정문이 TV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면 뉴스 내용과 관계없이 옛 추억에 젖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구치소 외곽 경비 및 교도관 업무 지원을 하는 '경비교도대'라는 신분으로 군복무를 했기 때문이다.


육군훈련소 신병교육을 마치고 서울구치소에 처음 배치받았을 때 너무나 생소했던 구치소의 환경에 어리둥절했었다. 높은 담장과 담장 중간중간에 있는 감시탑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이 느껴졌고 구치소 창문 및 내부 통로 곳곳에 있는 많은 철창문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이질적인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런 생활환경에서 재소자들은 육체적으로는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적으로도 많이 답답하고 절망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무를 하면서 재소자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노역장에서, 법원ㆍ검찰청에 가는 호송차에서, 그리고 면회장소에서 보는 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죗값을 치르고 갱생을 다짐하는 곳이기에 수반되는 감시와 통제라는 굴레가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어떤 이들에게는 빈곤과 가족의 무관심, 사회적 냉대 및 냉소가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눌러 표정을 일그러지게 하는 듯했다.

구치소 내에서도 가난하거나 가족들의 무관심으로 영치금이 없는 사람들은 담장 밖에서 겪었던 상대적 빈곤 및 박탈감을 계속해서 겪는 것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당장 본인도 겨울에 입을 수 있는 따뜻한 솜털 옷 한 벌도 사지 못하면서 담장 밖의 가족들의 생계를 염려하는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게 했다.


내가 근무하던 시기에는 1년에 한 번 사형 집행을 했다. 사형수들은 빨간색 수인번호를 가슴에 달고 있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사형수들을 마주칠 때면 섬찟하면서도 관심이 가게 되는데 이상하리만치 평범하고 악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사형수는 의외로 밝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의아하기도 했다. 매년 12월 어느 날 구치소 안으로 여러 대의 구급차가 들어오는 날이면 사형집행이 있는 날이었다. 그 밝았던 표정의 재소자는 그해 12월 이후에는 보이지 않았다. 멀쩡했던 한 생명이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하는 상황이 여러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을 혼란하게 했고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아주 가까이 있고 쉽게 뒤집힐 수가 있는 것이라는 철학적 사고도 하게 했다. 그토록 담장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살아서는 나가지 못하고 죽어서야 나가는 모습은 죄와 벌의 차원을 너머 숙연한 마음을 갖게 했고 명복을 빌게 했다.

형기를 마치고 구치소를 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갱생의 다짐을 잊지 않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일반 군인들의 생활과는 좀 색다른 군생활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알기에는 비교적 어린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많은 사람들의 고뇌와 슬픔, 참회, 연민, 걱정, 불안, 초조, 허무, 감사, 애정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러한 경험들을 내 삶의 태도나 생각에 긍정적인 요소로 조금씩 녹여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담장 안이 아닌 담장 밖의 삶에 감사하게 됐고 사형수들이 살아있는 하루하루를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서울구치소에서의 군생활이 내 생각과 가치관에 많은 영향력을 줬기 때문인지 TV 속 서울구치소 정문을 보면 그때가 많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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