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안녕하세요.

누군가의 말. 02

by 달님

엘리베이터는 비어있는 게 좋았다. 꾸물거리는 아이를 재촉하며 나서는 아침 출근길이라면 더욱 그랬다. 평일 오전 8시, 나는 늘 엘리베이터를 탄다. 19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는 마음이 급할수록 더 자주 멈추고, 드디어 5층에서 문이 열린다. 벌써 1층인 줄 알고 내리려던 사람의 얼굴에 옅은 실망감이 스친다. 나는 그들을 짐짓 못 본 체하며, 딸의 등을 밀어 사람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면, 나는 찰나의 고민을 했었다. 인사를 할까 말까? 아무도 안 받아주면 민망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 몸은 반쯤 엘리베이터에 들어갔고, 등을 돌려 자리를 잡고 서면 인사를 하기엔 이미 너무 늦고 마는 것이었다. 5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30초도 안 되는 시간, 나와 동행자들은 엘리베이터 층수를 알려주는 숫자판과 핸드폰 화면만 번갈아 쳐다본다.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느릿느릿 문이 열리면, 우리는 서로에게서 도망치듯 공동현관문을 향해 나가서 뿔뿔이 흩어진다.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빈 엘리베이터에 혼자 타면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여름의 끝이라기엔 10월에 가깝고, 가을의 시작이라기엔 여전히 열대야가 기승이던 어느 날이었다. 한 시간 반을 지하철에서 시달렸던 참이었다. 지하철 에어컨은 한여름에 카디건을 껴입어야 할 만큼 냉랭하게 바람을 쏘아대다가도, 9월 중순을 넘어서면 융통성도 기세도 잃고 만다. 한낮 최고 기온이 28도에 육박하든, 사람들이 얼마나 바글거리든 상관없이 말이다. 나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복잡한 지하철 속에서 납작하게 짜부라진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모임의 대표로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있어 오랜만에 재킷을 입고 구두를 신었다. 차림에 맞게 골라 맨 작은 숄더백에 들어가지 않는 회의 자료는 따로 파일에 담에 손에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텀블러를 담은 작은 가방을 들었다. 손에 잔뜩 든 짐 때문에 재킷을 벗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땀 때문에 자꾸만 코에서 흘러내리는 선글라스를 연신 추켜올렸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에 짓눌린 새끼발가락은 아까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차리라 맨발로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짜증이 치솟는데, 좁은 인도 위로 마주 오는 사람들이 툭, 툭, 치며 지나간다. 입모양으로만 욕을 하며 오지 않는 버스에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우리 집 근처까지 가는 마을버스는 딱 한 대, 그마저도 배차 간격이 길었다.


한참 만에 도착한 버스의 계단을 올라서자 황홀한 냉기를 나를 감쌌다. 나는 손으로는 버스카드를 태그 하며 눈으로는 빈자리를 찾아 훑었다. 하차하는 뒷문 근처 혼자 앉는 자리, 내가 좋아하는 그 자리가 비어있다. 저기에 앉아 땀을 식히면 집까지 갈 기운을 차릴 수 있을 터였다.

“안녕하세요.”

나한테 하는 말인가? 뒤를 돌아봤지만 타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버스 기사는 내 눈을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엉겁결에 같이 인사를 하고는 얼른 마음속으로 찜해둔 자리에 앉았다. 아는 사람으로 착각한 거겠지, 괜히 덩달아 인사했다는 생각에 무안해졌다. 버스는 곧 다음 정거장을 향해 달렸고, 내리려는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 카드를 태그하고 있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문이 열리자 버스 기사는 내리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어떤 사람은 쑥스러운 듯 작은 소리로 답했고, 또 어떤 사람은 운전석까지 들리도록 크게 인사했다. 다음 정거장에서도, 그다음 정거장에서도 같은 장면은 반복되었다. 버스 기사는 타는 사람에게는 안녕을 묻고, 내리는 사람에게는 오늘 하루의 행복과 즐거움을 기원해 주거나 안전한 귀가를 바라주었다. 인사를 듣고 그냥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라도 한 마디씩 크고 작은 인사를 돌려주었다. 내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경쾌했고, 입과 눈은 반달을 그리고 있었다. 간지럽고 몽글몽글한 솜사탕빛 기운이 버스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인사를 했을 뿐인데, 초현실주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 배경이 바뀔 수 있단 말인가.

버스는 마지막 정거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짜부라졌던 내 몸과 마음도 바람을 채운 풍선 인형처럼 차오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솜사탕빛 기운으로 빵빵하게 차오른 나는 누구보다 크게, 멋지게,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게 뭐라고, 내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마침내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처럼 망설이고 말았다. 버스 기사는 그래왔듯이 내게도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준비한 것보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도 입으로 반달을 그리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 후끈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나는 현실로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버스를 타기 전과 버스에서 내린 후, 내 안에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던 그것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인사를 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내가 이곳에 도착했음을 알리기 위한 일이 아니다. 만나고 헤어질 때 예의를 표하는 일만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너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그리고 너의 옆에 내가 있음을 알려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다. 비록 버스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를 오가는 짧은 시간 동안 일지라도. 안녕하세요, 적당히 바람이 시원해 기분이 너무 좋아요, 유후. 괜히 때 지난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나는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면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한마디에 어색했던 공기가 살짝 따뜻해짐을 느낀다. 가볍게 목례로 답하는 위층 아가씨, 나보다 더 크게 인사해 주는 중학생 형제, 미소를 보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는 14층 할머니에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지금 나와 마주친 그가 무탈하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보낸다. 인사 한마디가 뭐 그리 어렵다고 긴 시간 고민하고 용기씩이나 내야 했던 걸까. 손끝보다 마음이 더 시린 2024년 12월이다. 우리에게 평안과 안정이 다시 찾아오기를. 부디, 안녕(安寧)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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