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병실

나의 말. 05

by 달님

“김치 아직 있니?”

엄마의 전화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의 대화 절반은 냉장고 속 김치나 참기름의 재고 파악, 나머지 절반은 딸아이에 관한 것이다. 어쩌다 근황을 나누다가도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부터 커지는 내게, 엄마는 이내 입을 다물고 만다. 엄마에게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거나 수다를 떠는 건, 동생의 몫이다. 동생이 딸 같은 아들 역할을 하고 있으니, 나는 아들 같은 딸을 맡아야 균형이 맞을 거다. 하지만, 엄마와 나 사이는 모녀보다는 전우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고등학생 시절,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 후 집으로 돌아오면 11시쯤이었다. 진짜 피곤한 밤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엄마와 나는 거의 매일 밤 술에 취해 길에 누운 아버지를 데리러 언덕을 내려가야 했다. 우리는 물먹은 솜자루 같은 아버지의 무게를 나눠지고 다시 언덕을 올라왔다. 이미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라도, 누구에게 다시 들키기 전에 이 짐덩어리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가 엄마를 향한 험한 말을 쏟아낼 때면 나는 엄마 앞을 가로막아 섰고, 그런 나를 향해 쏟아내는 아버지의 상스러운 말은 엄마가 몸으로 받아내었다. 우리는 공동의 적으로부터 서로를 막고, 보호하며, 살아내야 했다. 이십 년이 훌쩍 지나도록 우리는 그 시절 무용담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것은 엄마와 나의 암묵적 약속이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작년 여름, 엄마는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 가족력이 있어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초기에 발견되어 아주 어려운 수술도 아닐 거라고 했다. 섬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생은 엄마의 입원을 위해 짧은 휴가를 냈다. 배를 타고 섬에서 나와 차를 타고 엄마가 있는 안동으로, 안동에서 엄마를 모시고 병원이 있는 대구로, 긴 이동에 지쳤을 텐데도, 동생은 살뜰히도 엄마를 챙겼다. 내가 친정에 들르지 않은 몇 해 동안, 동생과 엄마 사이는 전보다 훨씬 돈독해져 있었다. 그 틈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다시 섬으로 돌아가야 하는 엄마의 아들에게, 내가 있으면 엄마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엄마와 단둘이 남은 내가 어색할 것 같다는 걱정의 다른 말이었다. 8인실 병동은 좁았고, 환자용 침상을 둘러싼 커튼은 그 공간을 더 좁게 만들었다. 이 작은 네모 속에서, 엄마와 단둘이, 2박 3일을 보내야 한다.

“엄마와 단둘이 있는 게 불편해.”

딸이 내게 이런 말을 한다면 나는 어떤 마음일까? 아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침 인사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도록 너에게 사랑을 표현하리라, 세상 그 어떤 폭력으로부터도 너를 지켜내리라, 네 옆에 마지막 한 사람이 남는 다면 그것은 내가 되리라. 잠든 딸의 손과 발을 주무르며 나는 다짐하곤 한다. 자식을 낳아보면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은 내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나는 오히려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때 왜 나를 지켜주지 않았어요? 왜 내가 엄마를 지키게 그냥 두었어요? 나를 사랑했었나요?’

아이가 잠든 밤, 나는 엄마에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외쳐 물었다. 어느덧 원망은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를 향해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침묵이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대구로 내려오기 위한 짐을 쌀 때, 내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두꺼운 책 한 권과 이어폰이었다. 대화가 끊길 기미가 보이면 나를 지켜줄 무기였다. 필요한 물건은 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병원에 도착하니 놓친 것들이 생각났다. 며칠 전부터 입원을 위한 짐을 쌌을 엄마도, 평소 꼼꼼함은 어디로 가고 사야 할 것이 더 있다고 했다. 우리는 종이컵과 치약, 간단히 끼니를 때울 즉석밥을 사기 위해 편의점을 찾아 병원을 헤집고 다녔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다시 엘리베이터로, 구름다리를 건너 옆 병동으로 돌아다니며 미로 같은 병원 속을 헤맸다. 보호자 식사를 신청하지 않는 대신 병원에 있는 모든 식당과 분식집, 카페와 편의점을 탐색했고, 음식 사진이나 모형을 보며 메뉴를 구상했다. 오늘 저녁은 햇반과 컵라면을, 내일 아침은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점심은 김밥을 먹고 저녁은 갈비탕을 먹으면 좋겠다며 쓸데없이 구체적인 계획을 짰다. 나는 좁은 병실 속에 엄마와 단둘이, 침묵을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아버지 이야기를, 구질구질한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낼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말만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병실로 돌아가던 길에 엄마가 먼저 좀 더 걷자고 했다. 어차피 앞으로 계속 누워있어야 할 테니, 걷는 게 좋겠다고 했다. 새하얀 병원 복도에는 별이 빛나는 밤이나 피아노 치는 소녀들 같은 조악한 복제 명화가 걸려있었다. 우리는 전시회에 온 관람객처럼 천천히 그림을 보고, 네이버에서 발췌한 작품 설명을 한 자 한 자 읽었다. 그림 감상이 끝나면 휴게실에 앉아 누군가 틀어놓은 미스터 트롯을 보다가 의사나 간호사의 호출을 받고 병실로 돌아왔다. 몇 바퀴를 그렇게 걸으며 엄마와 나는 쉬지 않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이야기가 끊어지면 안 될 것처럼, 무슨 말이든 했다. 책은 펼쳐보지도 못한 채 밤이 되었다. 침대가 불편한 탓인지,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엄마의 수술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보호자 대기실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새로운 사람 몇 명이 추가되었다. 어느덧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딱딱한 갈색 의자에 앉아 어제 못 본 책을 읽다가 이내 관두었다. 기차에서 듣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나를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을까 봐 이어폰은 한쪽만 꽂은 채였다. 수술실 밖 복도를 끝에서 끝까지 걷고 또 걸었다. 같은 곡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을 때쯤 누군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씨 보호자분!” 몇 번의 외침이 대기실에 울려 퍼지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찾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내가 엄마의 보호자구나.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말과 수술 중 체온이 떨어져 길어졌다는 말 뒤로 따라오는 말들은 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몸에서 들어낸 조직을 확인했다. 한때는 내가 살았던 그 작은 방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 엄마의 자궁이, 주먹보다 작은 핏덩어리로 내 눈앞에 있었다. 엄마의 여성성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엄마의 전우가 아니었다.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엄마와 내 삶의 가장 지독했던 교집합, 그 시간은 우리 서로만이 알고 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여자로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엄마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무기력하게 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엄마는 내게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들키고 말았다. 그 모든 순간을 보고, 기억하는 딸이 어렵고 두려웠으리라. 침묵을 더 두려워한 쪽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취가 깨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엄마는 입이 마른다고 했다. 손수건을 생수로 적셔 엄마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춥다고 겨우 속삭이는 엄마의 손과 발을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엄마의 차가운 손끝과 발끝까지 온기가 돌자, 내 눈에서도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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