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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Aug 23. 2024

이름값

누군가의 말 01.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역삼역, 우영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드라마는 한 편도 보지 않았지만 우영우가 누군지는 안다. 자폐 스팩트럼의 장애를 가진 변호사의 우당탕탕 사회 적응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드라마는 흔치 않은 주인공의 캐릭터와 배우들의 멋진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내게 이 드라마는 “우영우”, 거꾸로 읽어도 똑바로 읽어도 같은 그 이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우영우처럼 내 이름도 앞뒤가 같다.

      

  “선생님 이름은 토마토네요.”

  교직 생활 중 딱 한 해, 일 학년 담임을 맡았었다. 학년이 시작되는 첫날, 새로 만난 아이들에게 내 소개를 할 때면 이름 초성만 칠판에 크게 써두고 맞춰보라고 한다. 앞다투어 엉뚱하고 재미있는 이름을 외치는 아이들에게 정답을 말해주면 늘 앞으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이름이 같다며 재미있어한다. 그런데 대뜸 토마토라니. 첫날부터 담임 이름으로 별명을 지어주는 맹랑한 1학년 녀석 덕에, 그 해는 토마토 선생님이라는 별명으로 살았다.

  앞뒤가 같은 이름처럼 우리의 한 해도 시작과 끝이 같기를 바란다는 말로 인사를 시작한다. 처음 만나는 날, 기대에 부풀어 일 년을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이 마음이 학년이 끝나는 날까지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 이름을 걸고, 내가 나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하다.

               

  나는 학년 시작되는 첫날, 아이들 한 명씩 교탁에 나와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소심했던 내 어린 시절, 학년이 시작되는 첫날이 굉장히 두려웠다. 낯선 교실, 낯선 친구, 낯선 선생님과 다시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스트레스였다. 그때 유행이었는지 몰라도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 소개하는 시간이 꼭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이름과 작년에는 몇 학년 몇 반이었는지, 취미와 특기는 무엇인지를 말했다. 1번부터 시작해서 내 차례가 오는 동안 조금씩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억지로 쥐어짜 낸 목소리로 바닥만 보면서 겨우 내 소개를 하고 돌아와 책상에 엎드리면 그날은 여지없이 당첨이다. 작은 꼬투리에도 놀림거리를 찾아내는 장난꾸러기들에게 앞뒤가 같은 이름은 얼마나 재밌는 건수인가. 별별 시시한 이유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며 놀리던 아이들에게 싫은 내색도 한 번 못할 만큼 소심했던지라 혼자서 눈물을 삼키곤 했다. 왜 이름을 이렇게 지어서 놀림받게 만든 건지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장난꾸러기들은 상대가 소리를 치거나 등짝이라도 한 대 때리며 펄펄 뛰어야 장난 불이 활활 타오르는 법. 한마디 못하고 혼자 눈물만 또르르 흘리는 나는 별로 재밌는 상대가 아니었고, 이름으로 놀리기도 이내 시들해졌다. 그나마 아이들의 관심을 받던 그 짧은 순간은 금세 지나가고 나는 또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같이 조용한 아이로 교실 한구석을 지켰다.


    소심했던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남자애들과는 거의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름도 자꾸 불러야 기억에 남는 거라서, 동창 남자아이 이름은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직도 기억나는 이름이 하나 있으니, 바로 힘찬. 힘찬의 부모님은 당시 흔하지 않은 작명 센스를 가지셨던 것 같다. 학년초 가정환경조사서에는 한글 이름과 한자 이름을 병기해서 내는 것이 국룰이었고, 힘찬과 같은 반이었던 그 해 담임선생님은 자기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한자 이름을 외우게 하셨다. 처음으로 써보는, 아니 그려보는 한자가 얼마나 복잡했던지 모른다. 한자 이름을 외우던 그 시간, 오로지 힘찬만은 자유시간을 가졌다.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그 아이만 순우리말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찬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순우리말 이름이어서가 아니다. 힘찬은 축구차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한 시커먼 남자애들 사이에서 유독 뽀얀 피부를 뽐내는 순둥이었다. 힘찬이라는 이름을 지으며, 그의 부모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운동장을 누비는 날렵한 축구대장이었다면 조금 더 잘 어울렸을 그 이름을, 하얗고 말캉한 순두부나 보송하고 탐스러운 복숭아 같은 힘찬이가 가졌다니.  

    

  “니는 이름은 힘차인데 아가 히마리가 한 개도 없노.(너는 이름은 힘찬인데 애가 힘이 하나도 없니.).”     


  선생님인지 아이들 중 하나였는지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와르르 같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힘찬의 표정이 기억나진 않는다. 그 아이도 같이 웃었을까, 아님 눈물을 참고 있었을까. 이제와 생각해 보니 힘찬은 이름 덕에 꽤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힘찬은 전학을 갔고 이후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힘찬이란 이름의 무게를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이가 태어나기 전, 남편과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이름 짓기였다. 우리는 언젠가 다른 나라에서 살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렇지 않더라도 세계 어디서든 원하는 것을 하며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 이름을 한글과 영어 어느 쪽으로 쓰고 읽어도 어색하지 않게 짓고 싶었다. 거기에 너무 흔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튀지 않아야 하고,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두루 어울리는 이름이기를 바랐다. 이왕이면 한자이름의 뜻까지 멋진 의미를 담아야 했다.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통과하여 최종 당첨된 이름은 우리 부부 마음에 쏙 들었다. 아직 같은 이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미국인인 아이의 고모부도 이름을 편하게 부를 수 있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영어수업에서도 따로 영어 이름을 지을 필요 없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뿌듯했다. 한영호환이 용이하고, 흔하지 않으면서도 기억하기 좋은 완벽한 이름을 우리가 찾은 줄 알았다.


“레? 래?”

“어, 이 아니고 아, 이입니다.”


  아이 이름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반복되는 대화다. 우리 딸은 앞으로 자기 이름을 말할 때마다, “어, 이 아니고 아, 이입니다.”를 설명하며 살아야 하겠구나. 완벽한 이름을 가진 자가 치러야 할 이름값인 셈이다. 어쩌면 이름 주인은 제 이름을 썩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꽤 오래 모임을 함께 한 선배 중 하나의 카카오톡 별명은 “동백”이다. 전국 여기저기 명산을 찾아다니고, 가끔 꽃사진, 나무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던 터라 특히 동백꽃을 좋아하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다. 선배의 별명이 동백인 연유를 알게 된 건 얼마 전 모임에서 나눈 대화였다.   

  

  “대학 때 짓궂은 선배들은 노래 잘하겠다면서 한 곡 하라고 그랬지.”

  “갑자기 노래를 시킨다고요? 선배 때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아니, 내 이름이 이미자니까 그렇지.”     


  이미자와 노래는 어떻게 연결되지? 싶다가 번뜩 떠올랐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에 들르면 꼭 보아야 했던 가요무대, 이대 팔로 단정하게 머리를 다듬은 사회자가 소개했던 가수 이미자.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또래라도 앞의 두 마디쯤은 어디선가 들어봤어! 할 만큼 유명한 바로 그 노래, 동백아가씨의 주인공 가수 이미자와 선배의 이름이 같았다. 동백 아가씨 덕분에 별명이 동백이구나!


  “선생님 이름은 받침이 하나도 없어. 쓰기도 읽기도 정말 쉽지?”


  놀림도 많이 받았던 촌스러운 이름이지만 아직 한글을 제대로 못 익힌 1학년 아이들에게 소개하기에는 제법 괜찮다는 선배의 말을 들으며, 이름이 주는 무게로 꽤 많은 고민을 하며 지낸 세월이 느껴졌다. "자"로 끝나는 여자이름은 일본식 이름 짓기의 잔재라서, 다른 이유가 아니라 꼭 그 이유 때문에 자기 이름을 싫어했었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선배에게, 하얀 눈 쌓인 겨울 붉게 피어나는 동백처럼 강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누구보다도 동백에 어울리는 사람, 자기 이름을 뛰어넘는 멋진 별명을 스스로에게 지어준 선배가 그날따라 새삼 멋졌다.


           

  요즘이야 마음만 먹으면 개명하는 건 일도 아닌 시대지만, 보통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군가로부터 받은 이름으로 살아간다. 아니지, 죽어서도 무덤 앞에, 유골함 앞에 그 이름을 새긴다. 늘 쓰고 부르는 이름, 생각보다 한 사람의 인생에 꽤 큰 무게로 새겨진 운명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 이름은 어질고 곧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름값만 하고 살기에도 쉽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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