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없는 미술 시간

나의 말 08.

by 달님

미술 시간을 좋아했다. 사물함에서 미술 도구를 꺼내어 늘어놓을 때면 특별한 기분이 들곤 했다. 먼저 떠오르는 건 4B연필이다. 옆으로 눕혀 잡고 도화지를 위를 스치듯 움직였던 4B연필의 감각은 남달랐다. 심을 길게 깎아 곧 부러질 듯 조심스러웠지만, 그래서 다른 연필들보다 우아했다. 목이 긴 백조처럼. 스륵스륵, 종이와 연필심이 만나 내는 소리마저 간지러웠다. 미끄러지듯 흘러 내려간 선 위로 손이 스치면 그만 그림자가 번졌다. 하지만 괜찮았다. 하얗고 몰랑한 잠자리 지우개가 있으니까.

잠자리 지우개의 감각은 따뜻함이었다. 지우개를 도화지 위에 대고 슬쩍 밀면 반듯했던 모서리가 금세 둥그러졌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는 거짓말처럼 하얘졌다. 엄마가 손으로 비벼 빨아주었던 양말처럼. 지우개 똥은 또 얼마나 부드럽던지. 땡땡하고 야문 필통 속 지우개와는 달랐다. 지우개 똥을 한데 모아 뭉치면 회색 찰흙이 된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놓고 굴리면 말랑하고 미지근했다.

스케치가 끝나면 제일 기다렸던 순간이 온다. 까만 뚜껑을 열면 서른 칸 무지갯빛 돌다리가 펼쳐지던 철제 팔레트. 하얀색 플라스틱 팔레트라면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어린이용 물감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까만 팔레트는 다르다. 그에게 어울리는 건 시내에 있는 큰 화방에서만 살 수 있었던 전문가용 수채물감이었다. 세룰리언블루 옆 칸에는 136번 코발트블루와 152번 울트라마린딥을 나란히 짜 넣었다. 팔레트 위에 펼쳐진 그러데이션이 망가지는 게 아까워 쉽게 붓을 대지도 못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물통을 펼치면 손끝으로 느껴지던 진동도, 쓸데없이 가득 담아 엎지르곤 했던 차가운 수돗물의 감촉도, 엄마따라 화장하듯 눈두덩이에 문질러봤던 붓끝의 부드럽고 까칠한 느낌도, 이제는 흐릿하다. 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하고, 황홀했던 무지갯빛 몽실한 감각의 덩어리로 내 어린 시절 기억 주머니에 남아있다.

내일 5, 6교시는 미술이다. 문득 바라본 교실 뒤 작품 게시판에 같은 모양의 작품들이 가로세로 줄맞춰 걸려있다. 모두 같은 도안을 받아 색칠하고 실선을 따라 자른 후, 점선을 따라 접었다. 색깔마저 거기서 거기인 것은 예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누구나 그럴듯한 작품을 완성했다. 나는 도안을 인쇄하면 되고, 아이들은 책상 서랍 속 색연필과 사인펜을 꺼내 색칠하면 되고. 엎질러진 물도, 하얀 티셔츠에 튄 물감도, 채색하다 망친 작품도 없다. 그림은 없고 색칠과 자르기만 남은, 평화롭고 차가운 미술시간이다. 갓 인쇄를 마친 A4용지에 남은 프린터의 온기만이 지금 아이들이 느끼는 따뜻함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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