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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님 Jul 03. 2024

텃밭의 여름

자연의 말 01.

  그해 여름 밥상은 유난히도 초록이 가득했다. 마트에서 자주 봤던 청상추와 꽃상추부터 식감이 예상되는 아삭이 상추, 잎끝이 나풀거리는 레이스 같은 청치마 상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이름이 나왔는지 알쏭달쏭한 담배 상추, 여기에 양상추며 치커리, 겨자채,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온갖 쌈채소까지. 농사를 글로 배운 초보 농부는 뒷일은 생각지도 못한 채 온갖 씨앗과 모종을 사들여 밭이 뿌려놓고야 만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제철 나물로 정갈한 밥상을 차릴 거야. 로맨틱한 영화를 꿈꾸지만 현실은 언제나 시트콤이라는 내 인생 불변의 명제를 그때는 떠올리지 못했다. 


  내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두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밭에만 다녀오면 양손 가득 한 보따리씩 상추를 가져오는 통에, 밥상에는 초록 대잔치가 벌어지게 되었다. 아침에 아삭이 상추를 듬뿍 넣은 샌드위치를 먹고, 점심은 갖은 상추와 쌈채소를 면보다 더 많이 넣은 비빔국수를, 저녁은 상추 겉절이나 쌈을 먹는 식이다. 상추를 하도 먹어서 졸린다는 실없는 농담이 절로 나왔다. 여기저기 한 무더기씩 나누어 주고도 냉장고 가득 상추로 차는 하루하루가 반복되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게도 6월 말쯤 되어 슬슬 상추에서 꽃대가 올라오고 잎도 쇠어가니, 그 지겹던 상추가 아쉬워지기 시작하는 거다. 보드랍던 잎이 조금씩 단단해지고, 맛과 향이 하루하루 그러데이션으로 진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가 여름을 먹고 있구나, 생각하니 애물단지였던 상추가 얼마나 맛있게 느껴지던지.




  봄에는 씨 뿌리고, 모종 심고, 언제 크나, 언제 크나 노래하며 기다리는 게 초보 농부가 할 일의 전부다. 양팔 벌려 기지개 켜는 떡잎과 그 사이로 올라오는 싹을 보는 재미는 잠시. 5월 즈음부터는 오글오글 머리를 들이미는 어린것들을 솎아주어야 하는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라고 부를 만한 일이 시작된다. 넓은 농장 한 켠에 열 평 남짓 작은 땅을 빌려 농사짓는 우리에게, 주인아저씨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마치 영화 속 복선처럼.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랍니다.”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6월, 초여름에 들면 작물들이 무섭게 자라기 시작한다. 여름작물들은 대체로 물을 좋아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물을 줘야 한다. 그것도 해가 뜨겁지 않은 이른 아침이나,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에 물을 줘야 하기 때문에 출근하면서 물 줄 시간 맞추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루 건너 하루에서 일주일에 두 번으로, 한창 농번기에 농태기(농사 권태기)로 텃밭 찾는 발길이 뜸해지면,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을 맞이하게 된다. 어째서 같은 땅에서 같은 물을 먹고 자라는데 잡초는 작물보다 더 빨리 자라는 걸까. 뿌리가 어찌나 억세고 땅속 깊이 내리는지. 잡초 같은 생명력이라는 비유는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몰라도 분명 농부였을 거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겨우 주말에 한번 가보면 애지중지 키운 작물들만큼 잡초가 자라 있는 걸 볼 수 있다. 7월 말 일주일쯤 휴가라도 다녀오면 과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작은 밀림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밀림을 밀어버려야 가을 농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건데, 아쉽게도 가진 농기구라고는 녹슨 호미 몇 개와 이 빠진 주방 가위 하나뿐. 

  육아는 아이템빨이라는 말에도 훌륭한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응수했던 나지만, 곧장 농업사로 달려가 업그레이드된 아이템을 장착하고 말았다. 상대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잡초니까. 내 발자국 소리만 더 자주 들려주었더라면 잡초들이 이렇게 강해지지 못했을 텐데, 주인아저씨는 초보 농부의 미래를 내다보셨던 걸까.     




  몇 년 시행착오를 거치며 우리 집 텃밭도 그런대로 모양새가 잡혔다. 상추만 가득했던 올챙이 적은 잊고, 잘 키울 수 있고 쓰임이 많은 작물을 필요한 만큼만 심는 요령도 생겼다. 그리고 다시 6월이다. 올해 여름 밥상은 지난해보다 조금 더 풍성해졌다. 갓 따온 상추는 여전히 쌉싸래하고 향긋하다.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과 한두 번 나눠 먹을 만큼, 딱 그만큼만 상추를 키운다. 상추가 물러난 자리엔 양배추와 양상추,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사이좋게 심었다. 팔자에 없던 열무김치도 담아보고, 뽑을 시기를 놓친 열무와 얼갈이를 갈무리해 삶아 한 팩씩 포장해서 얼려놓는 요령도 생겼다. 내일은 매콤한 열무 비빔국수를 만들고, 겨울 어느 날에는 따뜻한 우거지 된장국을 먹을 수 있겠다.

  콩을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6월 초에 딴 완두콩을 먹어보아야 한다. 옹글옹글 들어찬 연둣빛 알맹이는 달큼한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서 밥 한입 씹으면 입 안 여기저기서 토독토독 단물을 터트린다. 각진 듯 동그란 생김새는 아이 발가락처럼 어찌나 예쁜지. 그 맛도 모양도 완두콩이라는 이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   

  갓 캐온 하지감자를 쪄서 소금이나 설탕에 콕 찍어 먹는 기쁨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 한 입 깨물면 호로록 으스러지며 들어오는 감자는 하나만 먹어도 든든할 만큼 큼지막이 잘 자랐다. 내일은 작은 감자를 모아 알감자조림을 해야지. 감자를 갈아 만든 뜨끈한 옹심이 수제비도, 반죽 한수저씩만 놓고 작게 부쳐 파삭한 테두리를 많이 만드는 감자전도 빠트리지 말 것.

  삐뚤빼뚤 못생겼지만 아삭한 당근을 모두 모아 얇게 채 쳐서 당근라페를 만든다. 과정은 번거로워도 한번 해놓으면 샌드위치에도 넣고, 토스트에 얹어서도 먹고, 샐러드에 색감을 더해주기도 하면서 며칠 든든한 양식 반찬으로 활약한다. 향이 진한 깻잎과 잘라도 잘라도 또 올라오는 부추를 넣은 깻잎 부추전이 저녁 밥상 단골 메뉴가 되면서 맥주보다 막걸리를 사 오는 날이 잦아지고 있다. 

  슬슬 애호박과 가지, 토마토가 영글어 간다. 7월에는 동글동글한 녀석들로 밥상을 채울 수 있겠다. 애호박과 가지에 지쳐가다가 새삼 그 맛이 아쉬워질 즈음이면 다음 농사를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거다. 텃밭이 차려주던 여름 밥상의 은근한 맛을 그리워하며, 밭을 갈고, 씨 뿌리고, 모종 심고, 언제 크나, 언제 크나 노래하며 가을 오기를 기다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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