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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블루스 Apr 05. 2022

엄마는 너밖에 모르지 않는다

엄마라고 부르고 무거운 짐을 강요하는 사회

엄마라는 이름 앞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어 놓는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엄마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다 보면 그 역할이 너무 무겁다.

요즘 한참 인기 있다는 화장품 중 가희라는 제품이 있다. 

그 속에서 다뤄지는 여자는 어디에 있던 충실한 삶을 살지만 미모만은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라는 그런 취지의 광고들이 시리즈로 나온다.

아이를 돌보느라 지쳐 있는 엄마가 바깥을 나갈 때는 외모 점검을 한다. 

그 장면 어디에도 다른 이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 혼자 모든 일을 해 낸다.

분명 사진 속에는 아빠도 존재하지만 일상은 언제나 엄마 혼자이다.

광고에서 그려지는 모습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든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엄마의 자리이다. 

나아가서는 그 모든 희생을 엄마라는 굴레를 씌워서 강요하고 있다.

엄마는 이래야 해,라고 말이다.


어제는 "우리 엄마는 나밖에 모른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광고 문구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엄마에게 바라는 모습만 그려진 것이다.

엄마는 자식이 우선이긴 하지만 자식밖에 모르지는 않는다.

나도 모르게 '꼭 그렇진 않아.'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엄마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그 감사함의 표시로 화장품을 선물한다.

내가 만약 그 엄마였다면 화장품을 주지 말고 딸에게 독립해서 나가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언제까지 내가 너의 밥을 차려야 하니?' 이런 생각을 한다면 모성애가 없는 건가.

엄마도 친구가 더 좋고 나가서 노는 걸 더 좋아하고, 이것저것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싶고, 직장도 나가고 싶다.

엄마도 가족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고, 엄마도 가족이 빨아주는 옷을 입고 싶고, 엄마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엄마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사회는 그런 엄마를 좋은 엄마로 생각하지 않는다. 

미디어에서 엄마라는 소재를 다루면 특히나 그러하다. 본인들이 원하는 엄마상이니까.

엄마라는 이름으로 온 가족이, 온 사회가 희생이란 걸 강요하는 그 시선이 불편하다.

엄마의 욕망과 엄마의 온전한 존재를 인지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단지, 하나의 사람으로 바라보길 원한다. 본인들의 시선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깨닫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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