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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다 Jul 02. 2024

서재 그리고 깔바도스_02

파리에서의 열흘은 종교를 가진 이가 순례길을 걷듯 소설 속 주인공인 라빅의 흔적을 뒤따라가는 여정이었다. 오랜 시간 눈에 담은 활자 속의 그처럼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늦은 시간 센강을 지나 인적이 드문 골목을 걸었다. 저녁에는 카바레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공연을 보았고 밤에는 개선문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깔바도스를 마셨다. 기이한 일이었다. 이방인에 불과한 이가 지구 반바퀴 떨어진 타지에서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느낀다는 것이. 충만함과 곧이어 사라질 허망함이 혼란스레 뒤섞였다.

파리에서의 여정이 끝나갈 무렵 숙소 주인이 이따금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와 주로 마주치는 장소는 평일 오전, 뒷마당의 나무데크 위에서였다.

머물고 있는 방은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2층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방에서 나오면 작은 응접실이 보인다. 응접실의 아치형 창문 앞에는 원목으로 된 동그란 탁자와 노란 패브릭 안락의자가 두 개 놓여 있고 테이블 위의 가느다란 유리병에는 들꽃 몇 송이가 꽂혀 있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붉고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있다. 운이 좋다면 장난을 치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를 볼 수 있다. 1층 거실을 지나쳐 주방으로 가면 12인용 테이블 너머에 뒷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모자이크유리로 장식된 문이 있다. 문을 열면 데크와 나무난간이 있는 3평 정도의 테라스가 있고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몇 그루의 나무와 사용한 지 오래되어 보이는 그네와 미끄럼틀이 있다.

전날 시장에서 사 온 납작 복숭아를 먹으며 서 있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숙소사장이 턱수염을 긁으며 말을 걸었다.

“그림 그리기 좋은 날씨네요.”

거뭇했던 사장의 손끝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림도 그리세요?”

담배를 난간에 비벼 끄고 나를 흘긋 바라본 그가 말했다.

“본업이 화가예요. 숙박일은 부업이고. 그림은 그다지 돈이 되지 않으니까.”

“아, 그런가요?”

“제가 그린 그림 한번 보실래요?”

“네, 궁금해요.”

예의상 한 대답이었지만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액정을 내밀었다. 작은 화면 안에는 목탄으로 그린 파리의 지붕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때요? 건축가가 보기에는 제 그림.”

그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훌륭하네요.”

만족스럽다는 몸짓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은 그림이 팔리기도 해요. 기껏해야 4백 유로 정도여서 재료값이나 댈 정도지만 누군가가 내 그림을 원한다는 거에 의미가 있죠.”

“의미 있는 일을 하다니, 멋지네요.”

그에게 대답을 하며 다 먹은 납작복숭아씨앗을 마당으로 던졌다.

식당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긴 머리의 여자가 데크에 있는 사장과 나를 보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담배값을 꺼내 불을 붙이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K감독 알고 있죠? 프랑스에서도 인기가 엄청나요. 그가 영화를 찍어 유명세를 얻기 전에 파리에서 몇 년간 떠돌이처럼 살며 그림을 그렸는데 바닷가 근처에서 저와도 종종 만나곤 했어요.

그는 주로 닻을 묶어둔 철근 따위의 것을 그리곤 했어요. 그 그림을 보며 언젠가 저 사람은 유명해질 거라는 걸 직감했죠. 바닷가에서 그렸던 그림들이 K감독이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근원이라고 믿고 있어요.”

사실 K감독의 영화는 십몇 년 전 한편 보았을 뿐이고 그마저도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훌륭한 경청자가 된 양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양껏 기분이 좋아진 사장이 자신만 아는 허브화원이라며 지도 어플을 켜 동네의 모퉁이에 위치한 공원을 알려주며 말했다.

“언제나 서재를 가지고 싶었어요. 그림이야 날이 좋은 날 나가 그리면 되지만 서재는 그렇지 않잖아요. 돈을 벌기 위해 손님들에게 내주고 나면 남는 방이 없어요. 아쉬운 기분이 들 때마다 공원의 사람이 없는 벤치로 가 책을 읽어요. 제가 항상 앉는 벤치는 몇 시간이고 있어도 지나는 사람이 없어서 정말로 나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죠. 몰래 플라스크로 위스키도 마시고.”

꽤 동의가 되는 이야기였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수긍을 하며 지붕 쪽을 가리켰다.

“허브화원이 서재라니, 낭만적이에요. 그런데 옆집 지붕 위에 있는 고양이 사장님네 고양이랑 똑같이 생겼어요.”

“아니, 저 녀석이 왜 저기에 있지!”

화들짝 놀란 그가 순식간에 울타리를 뛰어넘어 옆집을 향해 달려갔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 남은 납작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는 옆집 뒷문을 열고 사라졌고 고양이는 여전히 지붕 위에서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전이었다.

방으로 돌아가 발목까지 오는 검정색 랩원피스로 갈아입은 후 캔버스가방에 에세이집을 챙겼다.

대문을 나서며 지도앱을 켜 공원 위치를 검색하자 도보 15분이 탐색되었다.

숙소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크루아상과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신 후 상점에 들려 깔바도스 한 병을 구입해 캔버스 가방 안에 넣었다.

숙소 사장의 말대로 인적이 없는 공원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웰시코기 한 마리와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여는 여자, 팔짱을 끼고 서로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걸어가는 남녀가 전부였다.

사장이 일러준 허브정원은 공원 입구에서 이십 분을 들어가고 나서야 나타났다. 밝은 석재로 경계가 구분 지어진 공간은 옹기종기 모인 잎들 사이로 허브의 이름을 표기한 팻말이 세워져 있었고 야트막한 담장을 등지고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벤치가 놓여 있었다.

벤치에 앉자 가을의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정원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깔바도스를 오픈해 병째로 홀짝이며 가방에서 에세이를 꺼냈다. 책장 사이에는 어제 방문한 카페의 영수증이 끼워져 있었다.

문장을 천천히 눈으로 훑어 내려가며 책을 몇 권 더 가져와 벤치에 쌓아두었더라면 그가 말한 대로 서재느낌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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