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비행기를 타기 위해 우버를 불렀다. 떠나는 마당이니 기분을 내고 싶어 목록 중 가장 높은 금액의 차를 선택했다. 도착했다는 알람이 떠 숙소 밖으로 나가니 검정색 벤츠 앞에 정장을 차려입은 운전기사가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깔끔한 동작으로 뒷좌석의 문을 열어준 그가 짐을 트렁크에 실은 후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동네를 벗어나 도로를 달리는 와중에 창밖으로 에펠탑이 보였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자 기사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려주었다. 우습게도 파리에 온 후 처음으로 보는 에펠탑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로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짐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회사로 복귀해 기계적으로 도면을 치다 커피를 마시고 공사일정을 체크하고 다시 도면을 치는 시간의 반복이었다.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의 열흘과 회사에서의 현재 중 어느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살고 있던 오피스텔의 계약이 만료되어 이전보다 큰 평수의 빌라로 이사를 했다. 원룸에서 두 개의 방과 거실이 있는 공간으로 확장되니 여유롭게 가구를 배치하고도 하나의 방이 남았다. 당연히도 그곳은 서재가 되었다.
모아둔 책들을 선반에 정리하고 유리진열대에는 모아둔 위스키들과 파리에서 구입해 온 깔바도스 2병을 넣어두었다. 꽉 찬 선반에서 밀려나 바닥에 쌓여있는 책들 옆에는 린넨으로 된 초록색 커튼이 늘어져 있다. 코너에는 몬스테라 화분을 놓아두고 책장 맞은편에 있는 테이블 아래에는 오리엔탈 문양의 붉은 카펫을 깔았다. 장스탠드가 방안 가득 안온한 온기를 뿌렸다.
서재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새로운 루틴이 생겨났다. 일과를 끝낸 평일에는 샤워를 하고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깔바도스를 마신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기도 하고 달짝지근한 깔바도스를 마신 후에는 피트위스키로 마무리를 한다.
어린 시절 이르게 책을 통해 접한 깔바도스보다 대중적인 위스키도 서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로망의 극단에 닿아있다는 점이 그렇다.
로망의 대명사라 불리는 느와르 영화들에게서 흔히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정장을 갖춰 입은 중년의 남자가 거대한 원목책상과 책장을 배경으로 크리스탈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음모를 속삭이고 서재라는 어두운 공간에서 온갖 은밀함에 대한 일이 벌어진다.
내가 처음으로 소유하게 된 서재도 조명을 제외하면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공간이다. 남향임에도 창과 근접한 거리에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남향에 대한 절대적 신념이 있다. 물론 향별로 채광의 차이는 무척 크다. 하지만 건물의 배치라는 것은 향뿐만이 아니라 위치한 지대, 토지의 레벨, 가까이 접한 건물들의 거리등에 대해 더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때로는 남향을 향해있는 서재가 북향인 거실보다도 햇빛이 들지 않기도 한다.
이것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본디 밝음이라는 것은 절대적 옳음이 아니다. 거주자의 공간에 따른 용도의 의해 중요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쉽사리 간과되지만 사람에게는 채광만큼 어둠의 중요성이 크다. 특히 서재와 같은 공간이라면 한 톤 낮은 그늘진 실내의 분위기가 책들의 변색위험을 낮춰주고 동굴 같은 색다른 아늑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의뢰받은 주거공간을 설계할 때 건축주의 취향에 따라 서재는 개방형과 은둔형으로 나누어진다.
개방형은 넓은 시야를 좋아하고 경관이 좋고 평수를 여유롭게 쓸 수 있을 경우에 적합하다.
개방형 설계를 할 시에는 넓은 창을 내고 외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책상을 배치한다. 채광을 한가득 받으며 창밖의 풍경과 함께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기 위한 용도이므로 큰 사이즈 또는 원형의 책상이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극대화할 수 있다. 양문형 미닫이를 설치해 개방성을 높여 소거실과 같은 용도를 겸할 수도 있다.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건축주의 경우에는 은둔형의 서재가 적합하다. 프라이빗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창을 크게 낼 필요는 없다. 높이가 좁고 가로로 긴 픽스창을 천장 가까이 설치해 간접조명과 같은 은은한 채광을 받으며 외부의 시야를 차단한다. 또는 폭이 좁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길게 이어지는 세로형 창을 설치해 답답함을 줄임과 동시에 외부의 시야를 분산시키며 인테리어 효과를 줄 수도 있다.
이러한 은둔형 서재는 큰 공간을 할애하기 어려운 콤팩트한 구조, 건물 간 간격이 좁은 도심지에 거주하거나 사적인 공간을 선호하는 건축주에게 적합하다.
원하는 서재의 컨셉을 잡고 가구를 배치하고 책을 빼곡히 정리하고 나면 남는 것은 원하는 술과 잔을 가져와 의자에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늘어져있는 것이다.
나의 서재는 종일 오후 5시의 채도를 지닌다. 위스키의 미지근한 온도처럼. 너무 차갑지 않은 어중간한 온도일 때 위스키의 향은 되려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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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영업담당인 K가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낸 기념으로 술을 사겠다 말했다. 40대 중반에 큰 키와 매끈한 애티튜드를 지니고 있는 K는 전 직장에서 위스키 마케팅 부서에 있었고 그가 안내한 곳은 논현동의 어느 바였다.
“근처에 제가 거래하던 괜찮은 곳이 있어요.”
핸들 위에 얹어진 손가락을 까닥이며 K가 말했다.
“좋아요, 내일은 출근도 안 하니까.”
내 대답에 K가 유쾌하게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얼마가지 않아 도착한 바는 불필요한 장식이 없는 클래식한 곳이었다.
K는 맥캘란을, 나는 라프로익을 주문했다.
잔을 부딪치며 K가 말했다.
“피트가 어떤 뜻인지 알아요?”
“위스키에서 나는 특유의 훈연향을 지칭하는 말 아닌가요?”
“맞아요. 흔히 아일라 지방의 위스키에서 풍기는 특유의 향을 피트라 하죠. 하지만 피트가 뜻하는 진짜 의미는 따로 있어요.”
“그게 뭐죠?”
“환경이요. 위스키 증류 전 보리를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이탄이 맥아에 베개 되는데 이탄은 토양이 가진 형질의 향을 띄게 돼요. 지금 마시고 있는 라프로익은 해안가의 조개껍질이 많은 퇴적층에서 만들어졌어요. 자, 다시 향을 맡아봐요. 라프로익이 가지고 있는 환경의 향은 어떻죠?”
잔 앞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시자 섬세하고 복합적인 향이 느껴졌다.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정말로 해안의 향이 느껴져요.”
내 대답에 K가 가볍게 웃었다.
천천히 위스키를 들이켰다. 이전보다 풍부히 다가오는 향이 그의 설명에 의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우리가 즐기는 모든 것은 스스로가 어떤 기분을 느끼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기 마련이니까.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자 남은 위스키가 둥근 유리의 곡선을 따라 출렁였다. 노을의 색을 닮은 액체에는 환경에 대한 기억이 스며들어있다. 인간의 역사, 온갖 생각과 감정을 담은 책을 보관하는 서재와 마찬가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