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을 하기 위해서는 2호선 전철을 타고 직장인의 거주지라 불리는 테헤란로로 향해야 한다. 역삼역 3번 출구에서 내려 밀도 높은 몇 개의 빌딩과 카페를 지나 회색 대리석으로 장식된 14층 빌딩을 마주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오르면 나의 무자비한 둥지가 나타난다. 본사인 이곳에서는 실무를 위한 설계, 인테리어, 공무, 마케팅팀 등이 근무를 하고 있다.
출퇴근 기록을 위한 지문을 찍고 사무실로 들어가 서랍장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컴퓨터를 켜 모니터에 캐드 창 하나를 띄워놓은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정수기 또는 제빙기 앞으로 가 텀블러에 얼음을 담는 것이다.
근무인원 30명 중 25명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기 때문에 정수기의 얼음은 9시 10분, 제빙기의 얼음은 10시면 동이 나고 만다. (나머지 5명은 카페인 섭취를 하지 않는 이상한 종자들이다.) 카페를 가면 무조건 뜨거운 커피를 마시지만 사무실에서의 커피란 뇌에 전류를 주입하는 용도이기 때문에 뒤처지지 않는 신속한 동작으로 얼음을 확보해야 한다.
가득 담긴 얼음에 에스프레소 쓰리샷을 붓고 회사 인트라넷에 들어가 공사 중인 현장 사진을 보며 둔탁해진 머리를 깨운다. 텀블러가 가벼워질 즈음이 업무를 시작할 시간이다.
사무실은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다른 소리들로 채워진다. 멈추지 않고 분쇄되는 커피머신, 파쇄기와 타자, 전투적으로 딸각거리는 마우스, 프린터에서 도면이 출력되는 소리.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이미 커피머신 옆에는 원두자국이 남아있는 종이컵들이 피사의 사탑처럼 쌓여있다.
에버랜드에서도 30분 떨어져 있는 용인의 모델하우스는 본사보다 일상에서 동떨어진 모습이다. 고객을 상담하기 위한 영업팀이 상주하고 있는 그곳은 2층 규모의 100평대 주택 4채가 남향을 향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건축주를 달콤한 현혹에 빠뜨려 계약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한 용도이니만큼 로망으로 가득 찬 공간에 곳곳에 설계되어 있다. 밝은 오크 패널로 된 천장이 자잘한 별 모양으로 타공 된 다락방부터 대리석으로 세공된 거대한 아일랜드, 모던한 디자인의 벽난로, 바비큐 파티를 위한 루프탑, 2층의 계단 옆에 설치된 미끄럼틀, 소거실을 통해 이동하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의 아이 방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안방에 설치된 책장 너머에 있는 비밀의 방이다.
비밀의 방이 있는 모델하우스는 4채의 주택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와이드 하게 뻗은 모임지붕이 특징이고 사각형 매스를 분할해 모던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원목으로 된 웅장한 현관문을 열면 보통 아파트보다 세배크기는 되는 현관에는 소나무 분재로 꾸며진 조경과 좌측에는 중문이, 정면에는 툇마루가 있는 손님용 다실이 있다. 중문을 열면 홀 너머 계단과 거실이 나온다. 중앙에 위치한 오픈형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이동하면 협탁과 작은 소파가 놓인 가족실이 나오고 건너편에 안방이 있다. 안방의 좌측에는 양개형 폴딩도어가 설치된 드레스룸과 와인셀러가 설치된 작은 홈바가 있다. 정면에 있는 거대한 침대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책장이 빼곡히 배치되어 있는데, 두 번째 책장을 밀면 비밀의 방이 나온다.
비밀의 서재는 폭이 2m 정도 되는 좁고 긴 형태의 방이다. 좌측에는 책 표지가 보이도록 눕혀서 수납하는 책장이 있고 정면에는 세로로 긴 픽스창과 좁은 폭에 딱 맞는 책상이 배치되어 있다. 은밀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책상 위에 올려진 스피커에서 에릭 사티 짐노페디가 반복 재생되어 나오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게 하는 작은 서재는 실용성이 있는 공간은 아니다.
책장으로 둔갑한 문은 수십 권이 책이 꽂혀있기 때문에 무게가 가중되고 일상적 용도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활용성이 떨어진다.
실용적이지 않다 해서 그곳이 불필요한 공간이 되는 것일까? 극대화된 로망은 그곳이 일말의 실용성도 존재하지 않을 때 자극된다. 간절하게 행하는 무가치한 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떠올리기 위해 가장 게으른 자세로 시간을 죽이며 고민해 본다.
모든 직업이 나름의 고충을 가지고 있지만 설계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더라도 쉽다 말하기 어려운 직종이다. 이쪽 업계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알 정도로 야근을 숨 쉬듯 하기도 하고 여러 회사를 거치며 귀가 따갑도록 들은 단어는 탈건이다. (탈출 건축!) 법규검토를 하고 현장을 체크하고 도면을 치고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따라 수정과 수정, 협의와 협의를 거듭하다 보면 기본적인 수면시간조차 보장하기 어려워질 때가 많다.
쉼 없이 마우스를 움직이다 모니터와 함께 몸이 펑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자리를 박차고 디저트를 사러 나가야 한다는 신호다. 목표지는 회사 근처에서는 팔지 않는 마카롱가게다. 불충함이 가득한 마음으로 옆자리 직원에게조차 어떠한 언질 없이 먼 길을 떠난다.
직장인과 가로수가 가득한 테헤란로를 지나면 비교적 한적한 분위기가 풍겨온다. 노천카페테라스에 앉아 양복을 입고 케이크를 나누어먹는 중년의 직장인 둘을 지나쳐 역삼을 언덕을 넘는다. 빼곡한 빌딩 대신 오래됐지만 고급스러운 주택들로 이어진 골목이 나온다. 그중 꽤 넓은 정원을 지니고 있는 주택을 개조한 카페로 들어간다. 내부를 적벽돌로 장식한 카페에서 바닐라맛 마카롱 두 개를 주문해 하나는 그 자리에서 먹고 하나는 포장을 한다. 훌륭하다 할 순 없는 맛이지만 중요한 건 맛이 아니다.
왔던 길을 되짚어 사무실로 돌아오면 50분의 시간이 지나있다.
카페라고는 몇 걸음 간격으로 나오는 역삼역 부근에서 고작 마카롱을 위해 소요된 한 시간은 지방출장과 다를 바가 없다. 별 맛이 없는 바닐라마카롱을 씹으며 무가치하게 버린 시간을 만끽하는 동안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풍선은 남몰래 부피가 줄어들어있다.
일상적인 야근을 할 적에 평균 수면시간은 4시간 정도다. 일정에 쫓겨 손에 모터를 장착한 상태로 도면을 치고, 토요일이 되면 일주일을 오직 일로 채우지 않았다는 위안을 삼기 위해 일할 때보다 전투적으로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신다. 12시가 넘어 일요일이 되면 육체는 온갖 피로와 알콜로 절여져 있다.
침실 암막커튼 틈새로 가늘은 햇빛이 새어들고 다시 그늘이 지고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로 느껴질 즈음 시체 같은 몸을 일으킨다. 해가 지기 직전의 여섯 시에 편한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고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밖으로 나간다.
첫 번째로는 관악산에서 안양천을 향해 길게 뻗어있는 집 근처 하천가를 걷는다. 2주 전 흩날리던 벚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시야를 가득 채우는 푸른 잎, 공중을 향해 쏘아지는 분수대, 구름이 걷힌 하늘이 시야에 가득하다. 하천가 도보는 사람 수의 절반만큼 산책하는 개들로 분주하다.
평소에 움직이는 신체라고는 손목 관절과 마우스를 두드리는 오른쪽 검지가 전부이므로 30분 정도를 걸으면 피로감이 침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예정된 동선의 카페로 들어간다.
외출의 두 번째 목적인 카페를 선택하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테이블이 의자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가, 배경음악이 지나치게 크지 않고 거슬리지 않는 크기와 장르인가, 상실감을 가지고 유턴을 하지 않도록 언제나 빈자리가 있는가 정도이다. 커피순위는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려나지만 다행히 이곳은 커피조차 훌륭하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한 모금 마시고 각설탕을 넣어 스푼으로 가볍게 휘저은 후 남은 커피를 한입에 들이킨다. 그리고 다시 카운터로 가 롱블랙을 주문한다.
일요일은 보통 잠이 깬 오전부터 오후까지 누워있느라 바빠 무엇도 먹지 못했지만 체력을 쓰지 않은 탓인지 크게 배가 고프지는 않다. 조금 출출할 때는 크루아상이나 라즈베리파이를 시켜 커피와 함께 씹어 먹으며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차츰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나있다.
마지막으로 지갑밖에 들어있지 않은 텅 빈 에코백을 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마트에 들른다. 쇼핑하는 품목은 크게 필요하지는 않으나 집에 있으면 좋을법한 식재료들이다. 탄산수와 제철과일, 후무스, 씨가 있는 올리브, 무가당 요거트 같은 것들.
집에 돌아와 냉장고 안에 있던 식재료들의 유통기한을 체크해 지난 것들을 빼놓고 쇼핑한 것들을 정리해 놓는다. 그날 산 음식은 바로 먹기도 하고 냉장고 안에 박제되어 잊히기도 한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일요일은 고작 서너 시간 남아있다. 위스키를 한잔 따라 협탁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기대듯 앉아 어떠한 의미도 없고 배움도, 교훈도 없는 시간의 허비를 누린다.
이러한 무가치한 시간이 없었다면 품 안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사직서를 꺼내 인사담당자의 얼굴에 던지며 탈건을 외쳤을지 모른다. 설계자로서의 정신건강에도 마찬가지지만 설계적 관점에서도 미적인 측면을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공간은 데드스페이스, 즉 죽은 공간이다.
이용하지 않는 공간이나 이용가치가 없는 공간을 뜻하는 데드스페이스를 최소화한 대표적인 곳은 아파트이다. 1958년 중앙산업이 성북구의 언덕에 지은 종암아파트를 시작으로 60년의 시간 동안 아파트가 대표적 주거지로 정착해 가면서 내부 공간은 조금의 데스스페이스도 용납하지 않는 효율적인 배치로 발전해 왔다.
30평대 아파트를 들어서면 구조가 대부분 비슷함을 느낄 것이다. 현관을 지나면 바로 거실이 나오고 일체형으로 되어있는 주방이 답답함을 최소화시킨다. 거실과 주방을 중심으로 두 개 또는 세 개의 방과 화장실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복도가 생성될 필요가 없고 거주자에게 생활패턴에 최적화된 동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더더기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주택을 짓기 위해 상담을 받는 건축주 중 아파트형 구조를 원하는 사람은 십 프로 정도에 수렴한다. 그중 십 프로는 변칙적으로 설계된 60평 이상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주택에서 데드스페이스로 지칭되는 곳으로는 계단의 하부, 복도, 가구사이의 남는 공간, 빈 벽면 등이 있다.
건축주는 계단의 하부공간을 무척이나 아까워하기 때문에 계단 밑 창고, 계단의 단을 그대로 살린 수납장, 계단 층계를 사선으로 마감해 아래 책상이나 보조주방, 붙박이 의자를 배치하는 식으로 활용을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건축주가 수집해 무더기로 내놓은 핀터레스트 사진 속에는 항상 하부공간을 버리는 노출계단이 포함되어 있다.
한 개의 실이 배치될 때 보통 한 곳의 면에 내부도어가, 외부창은 한두 개가 들어가는데 빈 벽이 아까워 모든 면에 과하게 창을 계획하고 가구를 채워 넣으면 방 안이 잡지를 마구잡이로 오려 붙인 중학생의 수행평가 포스터처럼 변하기 십상이다.
납작한 평면도에서 복도는 쉽게 버리는 공간으로 판단되지만 이러한 빈 벽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군더더기 없이 백색페인트로 마감된 복도에 픽스창으로 포인트를 두어 미술관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픽스창 너머 나무로 조경이 되어있다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한 폭의 그림을 일 년 내내 감상할 수 있다. 그저 지나는 것뿐 외의 용도가 없는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익숙함에 로망이 끼어들기란 척박한 일이다. 진정한 욕망은 그곳이 일망의 실용성도 존재하지 않을 때 자극된다. 무거운 책장으로 감춰진 비밀의 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