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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다 Jul 02. 2024

서재 그리고 깔바도스_01

영혼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경험을 한 이라면 알 것이다. 사건, 사람, 글 또는 영상에서 겪을 수 있는 그것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스며들고 녹아내려 거대한 나무처럼 의식의 곳곳에 뿌리내린다.

10월의 가을, 오후 4시. 파리에 도착했다.

샤를 드 골 공항은 혼잡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익숙한 청록색 캐리어가 느릿하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허공에 떠 있는 듯 몽롱한 기분이 남아있어 편의점에서 탄산수를 구입해 마시고 숙소로 가는 노선을 검색했다. 지하철은 악명만큼 더럽다 느껴지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 신문을 넘길 때마다 종이자락이 옷깃을 스쳤다.

예약해 둔 한인 숙소는 관리되지 않은 장미넝쿨이 담장을 휘감고 있는 노란색 2층 건물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작은 고양이가 재빠르게 뛰쳐나왔다.

숙소 사장은 오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작고 마른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짙은색의 청바지에 헐렁한 검은 티셔츠를 입고 해진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는 말수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방은 2층 두 번째 문이고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아침식사가 가능해요.”

간략한 안내와 함께 침실키를 건네받았다.

침대와 협탁 외에 별다른 장식이 되어있지 않은 방이었다. 정면으로 난 창으로 한적한 주택가가 내려다보였다. 한켠에 캐리어를 두고 짐도 풀지 않은 채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 들고 거리로 나섰다.

한국보다 서늘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여름의 공기가 남아있는 날씨였다. 입고 있던 가죽재킷을 벗어 왼쪽 팔에 걸치고 공원과 건물 사이를 지나쳐 지하철을 타고 샹젤리제 거리로 향했다.

테라스가 있는 바에 자리를 잡자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하늘 사이로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왔다. 흰색 셔츠에 검은 조끼를 입고 큰 키에 어깨까지 오는 고수머리를 한 남자였다. 손때가 탄 낡은 가죽표지가 있는 메뉴판을 펼치는 대신 깔바도스를 주문하자 미소를 지은 종업원이 고개를 까닥이곤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턱을 괸 채 주변을 둘러봤다. 순식간에 해가 저 버린 거리는 조명으로 반짝였고 옆 테이블에서는 젊은 남녀가 담배를 태우며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나직한 음성을 속삭였다.

입고 있던 붉은 꽃무늬 원피스 밑단 아래로 보이는 워커에는 며칠 전 현장에서 묻혀온 진흙이 닦이지 않은 채 얼룩져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쟁반을 들고 온 종업원이 작은 원형의 테이블에 간단한 스낵과 둥근 유리잔에 담긴 깔바도스를 올려놓고 흰색 접시 위에 두 개의 각설탕과 스푼을 세팅해 주었다. 까끌거리는 질감의 라탄의자에 몸을 기대고 깔바도스를 마시며 어둠에 잠긴 거리를 바라봤다. 눈앞에는 아치형 모양을 한 회색빛의 개선문이 빛나고 있었다.

삶에서 온전히 동떨어진 이곳에서 오직 문장으로만 존재하던 당신과 만나게 되었다고, 메마른 뿌리에 물을 주게 되었다고. 지독히 가라앉은 전율을 느끼며 그렇게 생각했다.

 

*

 

파리에 대한 열망을 설명하자면 12살 무렵의 무더운 계절까지 거슬러간다.

당시 살던 집은 청주 운청동에 위치한 주택이었다. 옆집에는 슈퍼가 있고 적벽돌로 지어진 담장에는 마름모 모양의 돌출 장식이 되어있다. 검은색 철제로 된 단조대문을 열면 소박한 정원이 나온다. 목련, 앵두나무, 벚나무,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어 계절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주택 우측 담장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피같이 짙은 진홍색의 얼굴만 한 꽃이 피어난다. 그 자태와 향이 극도로 우아하고 화려하기 때문에 꽃이 지기 전까지 마당 전체를 압도한다.

원목으로 된 현관문을 열면 현관 앞에 홀이 있고 우측에 거실이 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와 전면에 난 큰 창으로 마당의 온갖 꽃과 나무들이 보였으므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거실 한켠에는 체리목으로 짜여진 책장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키의 두 배 높이는 되는 책장에는 도통 알 수 없는 책으로 가득했다. 세계사를 전공한 엄마의 책은 대부분 한자가 뒤섞인 중국 혁명사, 마르크스와 아나키즘 같은 것들이었다.

야금야금 먹어치운 아동용 책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여러 책을 펼치고 한 페이지만에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책장을 덮고 다시 책을 펼치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고전문학전집 중 폭풍의 언덕이었다. 처음으로 진입한 성인용 도서로서 박수를 칠 만큼 훌륭한 선택이었다. 소설 속 남자주인공인 레트 버클러는 스칼렛 오하라에게 너의 작은 머리통을 호두처럼 으깨어버리고 싶어라고 말한다.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하는 짓궂은 행동이라고는 기껏 해봐야 고무줄을 잡아당기고 도망치는 정도일 테다.

활자로서 처음 겪어보는 증오와 집착, 그야말로 제목 그대로의 폭풍 같은 스토리에 깊이 매료되고 말았다. 책장 너머의 세계에는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금단의 영역을 넘어서는 감각을 남겼다. 그러니까 그건, 강렬한 자극과 함께 동반하는 떳떳하지 못한 불편함이었다.

이런 단어가 적합할지는 모르겠지만 겨울방학 한 달간은 12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흥분되는 시간이었다

방학이 끝나고 학기를 마무리하며 담임 선생님은 올해의 독서왕을 뽑는다며 학생들을 조용히 시킨 후 엄숙한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일 년 동안 열 권의 책을 읽은 학생은 손을 드세요.”

“일 년 동안 스무 권의 책을 읽은 학생은 손을 드세요.”

“일 년 동안 서른 권의 책을 읽은 학생은 손을 드세요.”

독서왕은 27권의 책을 읽은 여학생이 차지했다. 내가 읽은 책은 어림잡아도 백 권을 족히 넘겼지만 열 권의 책에 손을 들었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는 말했을 경우 벌어질 상황이 눈에 선했다.

‘대단하네요. 최근에 읽은 책의 내용은 어땠나요?’

‘주인공은 불법수술을 하고 매일 깔바도스를 마시며 카바레도 가고 여자들을 만나요.’

선생님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에는 불행히도 내 간은 크질 못했다. 그렇다고 다른 책을 이야기하기에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비탄에 빠지게 만든 건 레마르크의 개선문에 나오는 주인공 라빅이었다.

폭풍의 언덕 이후 어린이의 마음에 감명을 주는 책은 쉽사리 찾기 힘든 일이었다. 지난여름 할머니에게 놀이라며 속아 땡볕아래 옥수수를 따던 심정으로 다시 책장을 펼치고 닫기를 반복했다. 개선문의 첫 장을 펼친 순간이었다. 시니컬한 분위기로 쓰인 문장은 운명처럼 가슴에 벼락을 내리쳤다. 12살 겨울방학, 인생의 가장 거대한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책의 내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작은 머릿속이 온통 축축하게 젖은 회색빛 센강의 다리,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허무함에 휩싸인 남자, 전쟁과 향락이 뒤섞인 파리의 거리, 어두운 술집에서 마시는 깔바도스, 깔바도스. 허름한 호텔로 돌아와 홀로 깔바도스를 마시는 장면으로 뒤덮였다.

빼곡한 문장에 빠져들수록 평범하기 그지없을 교실의 풍경과 주변 모든 것들이 이질적으로 변화되었다. 활자를 되새기고 반복해 곱씹는 동안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 페이지를 보아도 익숙한 구절이었고 어두운 파리 안에서 살아가는 그는 내 일부가 되었다.

기껏 성인이 되었지만 지방의 도시에서 깔바도스를 판매하는 곳은 없었다. 작은 호텔방에서 독한 술을 들이키던 그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상에 앉아 위스키를 마셨다. 술잔이 비워지면 막연한 허망함에 휩싸였다. 불안함의 근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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