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과 요구르트

골목길 연작에세이

by 김보리

사업 신청지 중 가장 많은 사업이 진행된 곳이 숭의동이었다. 자가보다 세입자 비율이 많았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많이 거주하는 동네였다. 자신의 비용을 들여 시멘트가 벗겨진 담장에 새롭게 도색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료로 진행되는 사업이니만큼 수요가 많았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숭의동 골목길은 다른 동네와는 조금은 달랐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곧 무너질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허공을 쏘아보고 있는 늙은 노파, 빈집 담벼락에 걸터앉아 빈 골목길을 지키고 있는 여자아이, 슬레이트 지붕 아래 단칸방 대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허기진 낮잠을 자는 아저씨, 리어카 가득 생선을 싣고 다니며 동구와 남구 이곳저곳을 행상하는 아주머니, 누렇게 변해버린 메리야스를 입고 골목길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가 그 골목에 있었다. 녹슨 대문 앞에 놓인 화분에 상추나 대파 등을 촘촘하게 키우거나, 누군가 만들어 놓았을 의자나 평상에 두런두런 모이는 주민들 모습도 많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골목길이 너무 좁았다. 각종 고지서가 꽂혀 있는 굳게 닫힌 녹색과 하늘색 철제 대문만이 사람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저 골목길에 대한 감상적이고 정서적인 감상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나도 골목길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단독주택들이 즐비한 골목길이었다. 아침에는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로 활기찼고, 오후가 되면 아이들의 숨바꼭질과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딱지치기 소리로 분주했다. 저녁 무렵이면 천수야, 옥자야, 부르던 하이톤의 어머니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곳이었다. 숭의동 골목길과는 확연하게 다른 골목길이었다. 그곳 역시 재개발로 인해 모조리 밀려나고 아파트가 들어선 지 오래되었지만 말이다.


숭의동 한 주택가 골목이었다. 골목길 양옆으로 10곳의 주택이 사업 신청을 했다. 길가 한쪽에 온갖 짐들을 쌓아두고 갑바로 덮어둔 채 며칠을 그곳으로 출근했다. 아주머니들은 물이나 커피 등을 내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골목길 중앙에는 오래된 구멍가게가 있었다. 가게 앞으로는 평상이 있어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쉴 새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조색과 마감질을 하면서도 내 한쪽 귀는 그들의 이야기에 쫑끗거리곤 했다. 그중 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가게 앞에는 이층 집이 있었다. 1층은 주인집이고 이층에는 할머니 혼자 세 들어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별다른 왕래가 없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던 할머니는 어쩌다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아들 외에 가족은 없었다. 통장이 가끔씩 들러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할머니는 젊었을 적, 남편의 폭행을 피해 이 동네에 숨어들 듯 왔다고 한다. 한동안은 남편이 자신을 찾아낼까 싶어 쥐 죽은 듯이 지냈다. 동네 사람들도 그곳에 누가 사는지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일 년 정도 지나 할머니는 식당을 다니며 자신의 생계를 꾸려갔지만 혹여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밤일을 다녔다. 70대 중반까지 일을 하다가 허리와 무릎이 아파 일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은 지 10년이 되었다.


할머니가 집 밖 외출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일주일에 한 번 야채 트럭이 가게 앞으로 오면 오이 천 원어치, 두부 한 모, 콩나물 천 원어치를 사는 것과, 이 삼 주에 한 번 병원 가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두고 가게 앞 평상에 모인 사람들이 숙덕거렸다. 외곬진 성격 때문에 저러고 산다는 둥, 그러니까 이혼을 한 것 아니겠냐고도 했다. 어쩌다 평상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담벼락을 타고 넘어가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소리가 울리도록 창문을 닫는다고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할머니는 혼자 죽었다. 바깥출입이 없는 터라 주민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1층 주인집이 며칠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이층에 올라가니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고, 구급차와 경찰이 도착했다. 동네 사람들은 코를 막으면서도 연신 할머니네를 기웃거렸다. 소식을 듣고 도착한 아들이 유품정리업체를 동원해 집을 청소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저 팔짱을 끼고 살펴보는 것 이외 다른 할 일은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아주머니의 결론은 이랬다. 아무리 혼자 살아도, 아무리 기구한 사연이 있어도, 아무리 살림이 어렵다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과 왕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내가 만약 할머니 옆집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분명한 것은 매일 할머니 집 문을 두드리며 안부를 묻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틀에 한 번 소주를 사러 동네 슈퍼마켓에 갔는데 계산대 직원이 알은척을 할 때의 멋쩍음 같은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만 그 사람은 나를 모르기를, 행여 그저 스쳐 지나갈 정도의 앎이라면 제발 모른 척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두 번 다시 그 동네 슈퍼로 소주를 사러 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빈집이 되어버린 이층 집은 외부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허리와 무릎이 아픈 할머니가 오르내리기에는 아마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작업을 잠시 쉬던 시간, 가게 앞 평상에 앉아 할머니가 살았던 빈집을 올려다봤다. 한 아주머니가 수고한다며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건넸다. 목이 말랐던 터라 쪽쪽 빨았다. 요구르트가 바닥을 보일 즈음, 빈집과 빈병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잠깐 생각한 것 같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어딘가 낯익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주인공 이지안이 살고 있는 일명 후진 동네라 하던 곳이 다름 아닌 도색작업을 했던 숭의동 골목길이었다. 이지안과 박동훈이 어두운 밤길,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발을 맞추던 곳은 숭의동을 지나 송림동이었다. 두 사람이 나눈 드라마 대사보다 내 눈길은 드라마 배경 속 숭의동을 훑어보기 바빴다. 실제 숭의동과 송림동은 거리가 꽤 있는 곳이다. 그리고 나는 송림동에서도 꽤 오래 살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