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밤의 맥주

골목길 연작에세이

by 김보리

3월 4일 송림동 현대시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40대 남성이 술에 취해 점포와 쓰레기더미 등 5곳에 불을 질렀다. 남성은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상인들은 별다른 직업 없이 매일 시장에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으로 기억했다고 한다.


숭의동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송림동으로 이어졌다. 숭의동을 훑고 지나오니 허기가 졌다. 현대시장 맞은편, 송림동에 살면서 가끔 갔던 빵집이 아직도 있었다. 주인장과 안면을 트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었다. 적당한 빵을 골라 계산하면서 슬며시 물어보았다.


-시장에 불이 나서 어쩐대요?

-뭐 어쩔 수 없죠.

-보상은요?

-그런 게 어딨어요? 뭐 여기저기서 성금 모아주고 그런다고는 하지만 상인들이 제일 어렵죠, 뭐.


빵집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빵을 우물거리며 보았지만 건너편에서는 화재 현장이 잘 보이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뜩이나 침침한 시장 내부는 더 어두워 보였다. 검은 화마가 휩쓸고 간 현대시장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화재가 났던 상점들 바로 앞 상가를 지나던 한 주민은 상점 주인에게 인사를 하며 그래도 다행이네요, 걱정 많으시겠어요, 라는 말을 남겼다. 상점 주인은 연신 먼지를 털어내며 불에 타 버린 상가들을 근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현대시장 뒤쪽에는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었다. 하얀 휀스 뒤에는 건설 현장의 소음과 밀려 나간 일부 동네의 흔적만이 두서없이 섞여 있었다.


아파트 건설 현장 바로 앞 골목길에 위치한 주택에 세 들어 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개발의 영역에서 제외되어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래는 1층 주택이었는데 1층을 두 개의 집으로 구분해 세를 주고, 주인집은 2층을 증축해 거주하고 있었다. 주인집 할머니는 딸과 손자와 살고 있었다. 보험 관련 일을 하는 60대 후반의 주인아주머니는 세입자에게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다. 전기와 가스 요금은 개별적으로 냈지만 수도 요금만큼은 세 가구가 나눠 냈다. 이 모든 관리를 아주머니가 아닌 할머니가 했다. 주택 주변 청소 및 세금 관련 처리와 각 주택에서 나오는 재활용품과 박스 등을 수집해 용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가끔은 현대시장에서 마늘을 까거나 파 등을 손질하는 부업을 하기도 했다. 집에서 나와 모퉁이를 돌면 바로 현대시장이다.


세 가구가 하나의 대문을 공유하다 보니 대문은 24시간 열려 있다. 대문 우측으로는 내가 거주하는 집이었고, 대문 맞은편은 60대 아저씨가 역시 혼자 살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지만 드나드는 시간은 부정확했다. 주인집 할머니 얘기로는 건설 관련 일을 한다고 했다. 집을 개조하면서 단열과 방음에 신경 쓰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간혹 아저씨가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벽을 넘어 들려오기도 했다. 통화 소리뿐이겠는가.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다, 하굣길 초등학생들의 후다닥 달음박질 소리, 새벽녘 음식물쓰레기를 꺼내고 뚜껑을 쾅 닫은 뒤 재빨리 다음 집으로 움직이는 작업화 소리 등 온갖 다양한 소리들이 고스란히 들려오고는 했다.


어느 날이었다. 밤 1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다. 습하고 더운 바람이 창문으로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었다. 한 여성의 구둣발 소리가 또각또각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곤 옆집 현관을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자 여자는 다시 또각거리며 내 집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갔는 줄 알았다. 10여 분 정도 지났을까. 이번에는 내 침실 창문 바로 아래에서 구형 폴더폰을 뽁뽁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대신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0분 간격으로 번호를 누르고 세 번의 전화 끝에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너, 일산 아니잖아,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나 지금 너네 집 앞이야. 너 내가 시장에서 일한다고 사람 무시하는 거지? 넌 이 여자 만나고 저 여자 만나지만 난 안 그랬어. 너만 보고, 너만 좋아했어. 그게 나야. 그래, 나 미친년이야. 미친년이라 그래.


전화 소리가 뚝 끊기더니 이번에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렸다. 남자에게 줄 무언가를 가지고 온 걸까 싶었다. 그리고 여자는 비닐봉지에서 꺼낸 맥주를 길바닥에 콸콸콸 쏟아부었다.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을 사랑싸움은 며칠 뒤 반복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간, 여자는 지난번과 같은 패턴의 행동을 보였다. 역시 옆집 남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자가 궁금해졌다. 행여 여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게 창문으로 눈만 내밀었다. 앗, 그런데 내가 아는 여자였다. 현대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여자다.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노점에서 이런저런 잡다한 물건들을 판매하는 여자였다. 매일 시장에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여자를 기억했던 것은 독특한 그 여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여자는 전체적으로 깡마른 체구였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늘 순서 없이 산발적으로 흩날렸고, 초점 없는 눈은 어딘가를 쫓고 있었다. 간혹 물건을 사기 위해 손님이 와도 고개를 왼쪽으로 꼰 채 적극적으로 응대하지 않았다. 장사가 끝나면 여자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송림동 골목길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나도 골목길을 어성거리고 다녔기에 그 여자와 간혹 마주칠 때가 있었다. 좌우를 살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는 나와는 달리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만을 쳐다보며 걸었다. 가끔은 걸음을 멈춘 채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기도 했다.


세 번째 여자의 방문에 결국 옆집 남자가 밖으로 나와 여자를 끌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주인 할머니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들도 한밤중 일어난 사랑싸움에 할머니에게 불만을 늘어놓았고, 이 사실이 옆집 아저씨에게 전달되면서 한밤중 에피소드는 그렇게 끝이 났다. 중년의 여자와 남자가 휩쓸고 지나간 그 골목길에는 한여름이 남기고 간 뜨거운 그림자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