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하는 일

by 보리

by 김보리

나는 말이 없는 편이다. 아니 일상을 공유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편이 솔직하다. 이를테면 오늘 누구랑 점심을 먹었고 반찬으로 제육볶음이 나왔는데 너무 형편없었어, 라는 식의 대화를 타인과 잘 나누지 않는다. 그럴 필요를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그저 일이나 업무에 관한 이야기들만 주절댄다. 말하자면 재미가 없는 사람이다.


현장에 나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무언가를 조사하거나 취재를 해서 결과물을 얻어야 하기에 급속도로 말이 많아진다. 어제 있었던 일이나 과거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밭에서 일하고 있는 어머니들 옆에 앉아 부드러운 흙의 촉감을 느끼거나,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버스정류장은 익명과 기다림의 공간이다. 도시와는 달리 시골 버스정류장은 장날을 제외하고는 한가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야 한 두 명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 눈빛과 마음을 교환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도 아니면 주민들이 모여 앉아 쉬는 정자나 평상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이밀고 함께 휴식을 취한다. 당장 해야 하는 결과물에 대한 부담감 정도는 잠시 내려놓는다.


○○마을을 조사하면서 이장과 노인회장을 먼저 만나기로 한 날, 이장은 A용지로 제본된 책 두 권을 들고 왔다. 마을에 살던 분이 그동안 마을 일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 했다. 한 권은 새마을운동 당시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고, 다른 한 권은 마을에 전해지는 설화와 마을에서 부르던 민요를 기록한 책이다. 경기도에 거주한다던 어르신은 가끔 고향에 다녀가신다고 한다. 전화번호를 받아 연락을 하고 언제 가게 되면 마을에서 보자고 약속 아닌 약속만 했다. 기약 없는 만남이라 생각했지만 일주일 뒤 어르신에게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비워뒀던 시골집에 들어서니 두 명의 딸이 함께 했다. 딸들은 집을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어르신은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르신의 얘기는 맥락이 없었다. 설화를 얘기하다가 새마을운동을 하던 당시로 가기도 했다.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당시 어르신은 이장과 새마을지도자를 하면서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을 잘 사는 마을로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고 한다. 당시 육영수 여사에게 편지를 써서 마을 우물 개선을 부탁했다. 육영수 여사의 친필로 작성된 답장과 2만 원, 이발 기구 구입비 1천 원이 왔다. 우물 하나를 더 만들고 이발 기구를 구입해 어르신이 봉사를 다녔다. 마을 안길을 넓히기 위해 주민들과 협의를 하러 다니며 욕도 많이 들었다. 부녀자들과 절미 저축을 해서 마을 공동 리어카도 장만했다. 새마을사업이 마무리되고 먹고살기 위해 도시로 떠났다. 목욕탕에서 세신사로 일하기도 하고 공장에서도 일했다. 늘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부인이 작고하고 자식들은 혼자된 어르신을 고향 집에 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옛날 사진을 받기 위해 이 주 뒤 경기도로 직접 어르신을 만나러 갔다. 어르신은 딸이 운영하는 상가 2층에 기거하고 있었다. 상가 일을 봐주기도 했다. 어르신이 기거하는 집으로 함께 들어갔다. 오래된 앨범을 꺼내 함께 들여다보며 과거 기억을 회상했다. 어르신의 눈빛에는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있었다.


먼 길 왔다며 딸이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해서 근처 식당으로 갔다. 어르신은 순댓국을 앞에 두고 소주를 마셨다. 함께 하고 싶었지만 운전하고 가야 하는 길이 멀어 정중하게 사양했다. 어르신은 술 한 잔에 국물 서너 번을 떠 넣는 것이 전부였다. 순댓국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나를 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옆에 앉은 딸은 식사 좀 하시라고 했지만 어르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반 병 정도 마셨을까, 이번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구구절절 슬픈 가사였다. 어르신이 기거하는 집 창밖으로 보이던 산이 생각났다. 산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굽이진 산세만큼은 기억난다. 날이 좋으면 문을 활짝 열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막걸리 한 잔 기울이면 좋을 듯싶었다. 그런 날이면 어르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떠올려봤다. 그리고 지난겨울에 부음을 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참으로 피곤한 중노동이다. 조사나 취재를 마치고 들어오는 길은 밀려드는 피로감에 어깨가 묵지근하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면서 그동안 만났던 어르신들의 부음을 자주 듣는다. 그럴 때마다 발이 저리듯 아득한 슬픔이 몰려온다. 어찌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맥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저 멀리서나마 그들과 만났던 소중했던 기억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당신들을 기억하는 일, 그것만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