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니지만 by보리
휴대전화 알람에 눈을 뜨기 전 목탁 소리에 눈이 떠진다. 집 앞 작은 절인 월광사 주지스님의 불경 소리다. 아침 6시, 점심 12시, 저녁 6시 하루 세 번 정확한 시간에 불공을 드린다. 가끔 제사를 모시는 날이면 주지스님의 불경 소리가 담을 넘어 들리기도 한다. 담장 너머에서 누군지 모를 어떤 이를 향해 마음 깊이 인사한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집에 시계가 없었다. 굳이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손목시계 하나로 충분했다. 특히 시계 초침 소리를 견디기 어려웠다. 째깍거리는 초침을 따라 나의 시간들이 먹이사슬의 흐름에 잠식되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라는 시간 속에 나는 지금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이렇게 쓸데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쌓여 내 인생이 되는지,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맞는 일인지, 뭐 이런 종류의 조바심과 씁쓸함, 초조함이 시계 초침과 함께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 혼자 거주하는 집에는 오래된 벽시계가 3개 있다. 가족들의 성장과 세월을 함께 한 시계다. 얼마 전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시계를 버리자고 했다. 시계 없이 어떻게 사냐, 괘종시계가 얼마나 좋은 건데 그러냐, 밥을 안 줘도 되고 비싸게 주고 산 시계다, 등의 푸념이 어머니에게서 나왔다. 결국 모두 들고 갔다. 30년 넘은 괘종시계는 거실에, 출처가 불분명한 원형 시계는 침실에, 기념품으로 받은 네모 시계는 작은 방에 걸렸다. 집 어느 곳에서도 시간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지금 혼자 거주하는 나의 집에는 2개의 시계가 있다. 부엌에 걸린 시계와 거실에 있는 디지털시계다. 디지털시계는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고, 1개는 이사를 하면서 3000원에 샀다. 집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부엌에서 보낸다.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계를 샀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시계로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아 선택했다. 문득 한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충북 보은에 거주할 당시였다.
“집에 시계가 없어서 좋아요. 그리고 이 집이 왠지 익숙하다고 느껴졌는데 연탄 냄새 때문이었어요.”
생각해보니 그 집에 살 때만 해도 집에 ‘시계’라는 물건을 들여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에 얽매이며 살지 않았다. ‘6시’라는 시계를 확인하고 일어나고, ‘12시’라는 시계를 쳐다보며 점심 식사를 하고, ‘7시’라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가 떴으니 일어났고, 배가 고파 냉장고를 뒤적이니 12시였으며, 해가 지니 술시(술 마시는 시간)였다. 시원한 소주를 한 병 따서 털어 넣었다. 멸치를 잘근잘근 씹었다. 멸치의 비릿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바깥 풍경이 느릿하게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마감하는 일상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던 일상이 조금은 변화됐다. 시간에 맞춰 기상해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 시간에 집으로 돌아온다. 늘 시계를 옆에 두고 살아야 하는 직장인이 되면서부터다. 손목시계를 즐겨 차지 않았던 나에게 손목시계는 생활필수품이 됐다. 뭔가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다만 요즘은 의도하지 않게 쉬어간다. 퇴사를 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 57분, 오후가 되기 전 아슬한 시간이다. 잠시 시계를 들여다보며 나의 안녕과, 당신의 안녕과, 우리의 안녕을 묻는 지금의 시간이 무사하게 지나가기를 바라며, 간절하게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