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니지만 by 보리
내가 가장 온전하게 시골살이를 한 곳은 충북 보은이었다.
어떤 일로 한 마을에 갔다가 그 집을 발견했다. 1990년대에 건축된 벽돌식 주택이었다. 방치된 지 3년 정도 된 집이었지만 보일러만 교체하면 거주가 가능한 집이었다. 주인과 연락해 연세 30만 원에 계약했다. 이사를 하던 그해 겨울은 지독하게 추웠다. 이틀 정도를 읍내에서 다니며 청소를 했지만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이사 당일 근처 마을 주민들이 기웃거렸다. 아가씨 혼자 사나?, 뭐 하는 사람인가? 등등 새로운 입주자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인사를 했다.
반나절 정도 보일러를 돌리니 집안에 훈기가 돌았지만 기름은 금세 동이 났다. 결국 그 집에 사는 동안은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보일러를 가동하는 것에 그쳐야 했다. 대신 연탄난로를 들였다. 공기가 따뜻해지니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겨울에는 난로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난로 옆에서 밥을 먹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썼고, 술을 마셨다. 여름에는 텃밭에서 키울 수 있는 작물들을 길렀다. 김장용 배추, 서리태, 깻잎, 고추 등등 나 혼자 먹고 남을 정도였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옆집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여덟 살에 재봉틀이 떨어지면서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친정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사는 아주머니는 내가 사는 집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밥 먹었냐는 안부 인사를 매일 주고받을 수 있었기에 그 집에서 살았던 2년이라는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 고즈넉이 찾아오는 침묵과 고요의 시간에 내가 했던 것 중 하나가 바느질이었다.
그 집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방에는 전에 거주하던 할머니가 사용하던 물건들이 주인의 흔적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삼베, 밥통, 다라이, 사진첩 등이었다. 그중 나무 실패가 있었다.
오래된 것들을 보면 궁금증이 폭발한다. 이 물건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사용되었다가 버려졌을까.
할머니가 사용했던 나무 실패는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것은 아니었다. 재래시장이나 장물꾼들에게서 살 수 있는 흔한 실패였다. 실패에 감겨있던 하얀 무명실은 이불을 꿰매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 엄마의 연례행사 중 하나가 솜이불을 꿰매는 것이었다. 하얀 광목천이나 옥양목을 빳빳하게 다듬이질을 해서 솜을 넣고 꿰맬 때면 엄마는 으레 어린 나에게 귀퉁이를 잡고 있으라고 했다. 그래야 솜이불이 흔들리지 않고 잘 고정이 되었으니까. 하얀 천에서 나는 바싹 마른 햇빛 냄새가 좋았다. 엄마는 대바늘을 머리에 쓱쓱 문지른 다음 하얀 천과 솜이불을 꿰맸다. 무명실로 이어진 천과 솜은 묵직한 이불이 되고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이불을 덮고 잘 때의 기분은 따스했다. 그 기분을 다시 소환해보고 싶어졌다.
다락방에 굴러다니는 천을 이용해 방석 커버를 만들고, 잘 사용하지 않는 가방을 잘라 필통을 만들고, 읍내에서 천을 끊어와 커튼을 만들었다. 나에게 바느질이란 중고등학교 가정 시간에 배운 기본적인 바느질이 다였지만, 손바느질을 하는 그 시간 동안만큼은 바느질이라는 노동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어떤 잡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 땀 한 땀 박음질이 되어가는 선을 따라 복잡했던 마음도 단순해져 갔다.
보은을 떠난 뒤에도 바느질은 가끔 내 삶의 휴식처가 되어줬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조각 천을 뒤적인다. 바느질을 하면서 조각조각 부서진 내 마음을 꿰맬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