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니지만 by 보리
아버지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아침 6시에 기상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현관을 열고 신문을 확인한다. 신문을 거실 의자에 놓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뒤 양치질을 한 다음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본다. 어머니가 채 떼지 못한 눈곱을 비비며 부엌에서 밥을 안치는 시간이다. 신문을 둘러보는 시간은 20여 분이다. 훒어보기가 끝나면 그제야 의자에서 일어난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식탁에 앉는다. 어머니의 빠른 움직임 덕분에 밥과 국이 식탁에 놓인다. 소리 없는 침묵이 흐른다.
2008년 아버지는 파킨슨 병을 진단받았다. 처음에는 손 떨림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다리 움직임도 둔해졌다. 아니 둔해졌다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아버지의 일상은 더 단순해졌다. 침대와 거실 의자가 동선의 전부였다. 거실을 오가는 과정에서도 번번이 넘어졌다.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몸은 자꾸만 뒤로 빠졌다. 누군가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어 몸을 일으켜 주지 않는 이상 정작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1시간 이상 의자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어느새 스르르 눈을 감았다. 조는 것인지, 꿈을 꾸는 것인지, 생각을 하는 것인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절망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파킨슨병은 어느새 아버지의 입도 막아버렸다.
2014년 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 집을 오가는 패턴을 반복하던 아버지는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요양병원 병실 구조는 마치 기숙사 같았다. 똑같은 침대 4개가 서로를 향해 마주 보고 있다. 침대에 누운 환자들은 모두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일어나지 못했다. 식사 시간에 맞춰 레빈 튜브를 통해 식사가 들어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식사라기보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양 공급이다.
아버지가 처음 요양병원에 입원했을 때 만에도 침대에 기대어 조금씩 밥을 넘기기는 했다. 아버지보다 한참 작은 나의 어깨에 의지해 걷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번번이 세 걸음을 떼기는 어려웠다. 아주 가끔은 휠체어에 앉아 병원 밖 세상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손에는 늘 신문이 들려 있었다. 신문을 다음 장으로 넘기는 일이 어려워져 다 본 것을 확인한 뒤 신문을 넘겨드려야 했다. 그럼에도 신문은 아버지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병원 내에서 신문 보는 할아버지라 불렀다.
병원에 입원한 지 6개월이 되어갈 무렵 아버지는 더 이상 앉아 있지도, 신문을 보지도 못했다. 아침이 되면 눈을 뜨기는 떴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마치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쩌면 눈을 뜨고 자신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 버거웠는지도 모른다.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끝나는 일이 반복됐다.
위기의 순간은 몇 번 왔다.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말이었다. 정작 아버지 본인은 아무 결정도 하지 못했다. 대신 내가 결정했다. 무의미한 생명 연장으로 아버지를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행해지는 석션으로 입안은 전부 헐어있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아버지의 엉덩이와 발목에는 욕창이 생겼다. 그런 반면 아버지의 피부는 젊은 내 피부보다 매끈했다. 손톱도 단정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잠자는 모습은 갓 태어난 아기 모습과 흡사했다.
2015년 3월 10일 새벽 4시 35분, 아버지는 힘겹고 가느다란 숨을 놓았다. 아버지의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장례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실 의자였다. 몸이 반쯤 앞으로 기울어진 채 지팡이를 손에 쥐고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버지의 짧은 동선을 따라 거실 의자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한쪽 뺨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