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기억을 따라
오래된 현재를 걷다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여는 글

by 김보리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잊힐 뿐이다. 종종 기억은 사람들의 뇌리에 흐릿하게 각인되어 있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쫓아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대의 속성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정보들은 자고 일어나면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지며 과거의 기억이 되고 만다. 그 기억은 때로는 작고 볼품없다고 여겨지기도 하며, 남우세스러운 일로 생각되기도 한다. 과연 그러기만 한 것인가 자문해 본다.


작업을 하면서 예산리와 주교리를 가장 많이 돌아다녔다. 어디를 가도 장날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장날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외지에서 온 장사꾼들을 제외하면 면 단위에서 자신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가져와 보따리를 풀어놓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 몇몇과 중장년층 일부만이 장을 찾는다. 골목길에는 사람이 더 없다. 휑한 바람만이 떨어진 낙엽을 쓸고 갈 뿐이었다. 가게 역시 한가하다. 상인들은 지금 사람이 너무 없어 장사가 안 되니 큰일이라는 말만 했다. 노인만 있고 젊은이가 없다며 혀를 끌끌 찬다.


가게 문턱을 넘으며 양 어깨에 짐을 가득 얹은 듯 무거웠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발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정처 없는 나그네도 아니건만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때로는 바람이 불었고, 쨍한 겨울 햇살에 눈이 부시기도 했으며, 함박눈이 퍼붓기도 했다.


어느 날이었다. 오래된 양품점인 엄마 양행을 찾아 골목길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와 할머니 한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 양행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진즉에 없어졌다고 말한다. 아쉬웠다.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이야기가 끝났는지 등을 돌리고 각자의 길을 갔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나는 할머니 뒤를 따라 걸었다. 어디 가시냐고 물었다. 병원에 간다며 나 같은 노인네가 갈 데가 거기밖에 더 있냐고 덧붙였다. 11시 50분이었다. 조금 있으면 병원 점심시간이라고 했다. 가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밀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뒤를 따라 한겨울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리만 쏘다닌 것은 아니었다. 사라진 기억을 따라 어르신들을 만나러 다녔다. 어떤 이들은 수십 년 전의 일을 소상하게 기억하기도 했고, 다른 이는 자신의 부모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이는 늙어가니 찾아오는 이도 없고, 찾아주는 이도 없으며, 뭔가 해볼 생각도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옛날이야기를 하는 어르신의 눈빛만은 반짝였다. 어떤 이는 다 지나간 쓸데없는 이야기를 왜 물어보냐며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고개 숙인 어르신의 얼굴에 회환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지나간다. 반면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되어 간다. 낡고 쓰러져 갈 듯한 공간도 시간과 함께 인간의 손을 거쳐 온기와 애착이 가득한 공간이 된다. 그 모든 시간과 공간에 오래된 마음과, 오래된 사람과, 오래된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나와 우리의 과거를 반추하고, 지금 이 현재를 살아가는 동력이 되어주는 일이기도 하며, 앞으로 살아갈 나의 근간이 되어주는 일이다. 그리하여 오래된 현재가 쌓여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될 것이다. 언젠가 나는 사라지겠지만 기록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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