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기억을 따라가다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예산농업학교와 하숙촌

by 김보리

1944년생 차정신 씨는 예산농업고등학교 50회 졸업생이다. 1964년 예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예산농고를 입학해 토목과를 다녔다. 당시 진학반으로 토목과와 이과 2개 반이 운영되었다. 정문 진입로에 즐비하던 플라타너스 나무와 히말라야시다 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좋았던 것을 기억한다. 1년에 5~6회 정도 학교 운동장에서는 영화상영회를 하기도 했다. 큰 트럭이 들어와 스크린에 영사기를 돌려 영화를 상영했는데 예산읍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함께 영화를 보기도 했다. 차정신 씨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는데 가난한 학생들은 점심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굶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차정신 씨는 졸업 후 1970년부터 청양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에 근무하다가 1977년 예산농촌지도소에서 2004년 퇴직했다. 예산농업고등학교 토목과 동창들과 두 달에 한 번씩 토우회에 참석하고 있다. 지난 모임에서는 이제 1946년생들이 여든 살이 넘으면 모임을 해체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기로 했다. 칠십 대만 되어도 무언가 할 의지가 있지만 나이가 드니 비전도 없고 마음도 오그라들어 무언가를 하기가 어려워진다며 차정신 씨가 담담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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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생 한상진 씨는 예산농업고등학교 55회 졸업생으로 농업전문학교로 승격되기 전 마지막 졸업생이다. 오가면이 고향인 한상진 씨는 철둑길 10리를 걸어 통학했다. 차정신 씨 5년 후배인 한상진 씨가 재학 시에는 영화상영회가 없어지고 대신 중앙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졸업 후 예산군농업기술센터에 근무하다 2009년에 퇴직했다. 한 달에 한 번 예농 동창들의 모임인 예향회에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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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농고에 진학하기 위해 인근 홍성, 청양, 서산 등지에서도 학생들이 입학했다. 기숙사가 없으니 인근에서 하숙을 했다. 역전과 신흥동, 오리동 등지에서는 하숙집을 운영하는 가구들이 많았다. 학생뿐만 아니라 전문대학 승격 후 외지에서 온 교수들도 하숙을 하고는 했다.


예산6리 오리동에 거주하는 1941년생 왕영자 씨는 1970년대 자택 사랑채에서 하숙집을 했다. 작정하고 하숙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친척의 아는 사람이 예산농업전문학교 교수였는데 서산 사람이어 방이 필요했다. 하숙 좀 해도 되냐 물었고 방이 남으니 그러라고 했다. 그때는 지하수를 펌프질을 해서 물을 사용했는데 하숙하던 교수가 매일 아침이면 그날 사용할 물을 한가득 퍼 주고 출근했다. 그러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고향에서도 어머니가 형은 안 시키고 공동우물에서 자신만 물 퍼오는 일을 시켰고, 여기서도 내가 그 일을 담당해야겠다며 자진해서 물을 퍼 담았다.


왕영자 씨 집에서 하숙을 한 지 한 달이 안 되어 교수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금요일이면 여자 친구와 왕영자 씨 남편과 윷놀이를 즐겼다. 윷놀이를 해서 모은 돈으로 주말이면 점심을 사 먹으러 다녔다. 교수가 여자 친구와 결혼해 나간 뒤 학생과 교수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희한하게도 우리 집에 들어온 하숙생들은 몇 달 뒤에는 여자 친구가 생겨 결혼해 나갔다며 왕영자 씨가 고개를 숙인 채 크크크 웃었다. 처음 하숙했던 서산에서 온 교수는 이후 천안으로 갔고 몇 번 찾아왔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냈던 하숙집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함이 그의 발길을 재촉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산농고 학생과 교수 이외에도 타지에서 입학한 예산고등학교 학생들도 종종 하숙을 하고는 했다. 1990년 예산고등학교 재학 시 예산5리 신흥동 하숙촌에서 하숙을 했던 한 학생은 당시 하숙비가 10만 원이었으며, 식사와 빨래를 하숙집에서 모두 해결해줬다고 한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만 하더라도 하숙비를 쌀 다섯 말로 받거나 돈으로 받기도 했다.


하숙집 대부분은 ㄱ자형 구조에 방이 3~4개 정도 있었고, 식사는 마루에 상을 펴고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아침 7시와 저녁 6시에 식사를 했으며, 주말에 집에 가지 않아도 특별히 하숙비를 더 받는 경우는 없었다. 가끔 주말에 밥을 못 먹게 되거나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바빠 밥을 못하게 되면 아주머니가 5000원을 주며 밥을 사 먹으라고 했다. 5000원 받는 것이 좋아 부러 거짓말을 하고 돈을 받아 동흥루(현 동흥대반점)에 가서 자장면을 사 먹기도 했다고 한다.


하숙집을 운영했던 대부분의 주택들은 리모델링을 해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혹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 기억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숙집을 운영했던 자신의 과거가 남루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시절, 우리 모두는 배만 곯지 않으면 되었고, 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직업의 귀천을 떠나 가리지 않고 일했으니, 그것이 부끄럽거나 남우세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가족을 정성을 다해 보살필 수 있었던 정신적, 경제적 근간이 되어주었던 일의 기억이다. 그 기억이 비록 사라졌다고는 해도 그 흔적을 따라가는 어떤 이의 발걸음은 종종걸음을 치며 어느 골목길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10년 7월에 설립한 도립공주농림학교가 1922년 예산으로 이전해 충청남도공립농업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후 1932년 4월 예산공립농업학교로 개명해 농업과와 수의축산과를 설치했다. 1946년 9월 예산공립농업중학교로 개칭, 농업토목과를 증설했다. 1950년 5월 예산농업고등학교로 개편하면서 원예, 축산과를 증설하고 중학교와 분리했다. 1966년 12월 예산농업고등전문학교로 승격, 1974년 예산농업전문학교, 1979년 예산농업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92년 공주대학교 산업대학으로 개편되면서 1993년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으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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