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대동병원, 순천병원, 해동안과, 부인병원
어릴 적 병치레가 잦았던 나는 동네 병원 단골손님이었다. 병원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목에 생선 가시가 걸려 빼러 갔을 때다. 평소 생선을 좋아하는 선친을 닮아 어릴 적부터 생선을 줄곧 먹었다. 갈치의 잔가시를 미처 고르지 못하고 밥과 함께 목구멍으로 꿀떡 삼켜보려 했지만 넘어가지 못한 가시가 목에 걸려 캑캑거렸다. 어머니는 나를 업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동네 병원 원장은 둥그스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인상 좋은 할아버지였다. 어린 나의 눈에는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원장 선생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머리에 불이 들어오는 테를 쓰고 내 목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핀셋으로 생선가시를 용케도 끄집어냈다. 원장 선생은 껄껄껄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생선이 그렇게 맛있더냐?
그 뒤로는 배탈이 나도, 눈에 다래끼가 생겨도, 발목이 삐끗해도, 감기가 걸려도, 다리가 부러져도 동네 병원을 갔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와서도 근 10년 동안은 부러 버스를 타고 그 병원을 찾았다. 병치레가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동네 병원을 찾는 일이 적어졌다. 몇 년 뒤 원장 선생이 작고하고 병원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나와는 어떤 혈연관계도 없는 사람인 원장 선생의 작고는 뭐랄까, 믿었던 사람의 부재가 주는 허망함, 허전함 같은 것이었다. 청진기를 대고 진료해 주며 별일 아니라고, 몇 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해주던 원장 선생의 넉살 좋은 얼굴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진료를 받기 위해 갔던 장소가 기억의 공간으로 바뀌게 된 순간이었다.
예산읍 본정통에 위치했던 대동병원은 예산 모든 주민들의 동네 병원이었다. 예산군 고덕면 출신 1973년생 이재환 씨는 1975년 폐렴으로 대동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입원한 사실을 기억하지는 못하나 어머니가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불을 지폈던 장면이 선명하게 각인되었고 성인이 된 후 조부모에게 물어봤다. 겨우 두 살인데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조부모가 놀라워했다. 거기가 바로 대동병원이었다. 당시 폐렴을 심하게 앓은 이재환 씨를 대동병원에 입원시키고 조부모가 고덕면에서 나뭇짐을 지게에 져 날랐다. 당시 입원실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구조였는데 입원한 환자 가족들이 직접 나무를 져 날라 불을 지피고 음식도 해 먹었다. 이재환 씨는 원래 7남매였는데 그중 4명이 병으로 인해 일찍 목숨을 잃었다. 또다시 자식을 잃을지 모른다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 고덕면에서 예산읍내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게 했던 것이다. 최익렬 원장은 이재환 씨가 거주하던 동네 아랫집 아저씨의 친척이었다고 한다. 어쩌다 마지막 버스를 놓치는 날에는 최 원장이 입원실을 내어주며 자고 가라고 하기도 했다.
달나라이용원 이승순 사장은 대동병원에서 맹장수술 등의 간단한 수술도 이뤄졌던 것을 기억한다. 또한 대동병원 약제사인 이상윤 약사는 낮에는 수술을 보조하기도 했으며, 병원에서 퇴근하고 나면 진료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 미처 병원 진료를 보지 못한 이들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정식 의사 면허가 없었지만 당시는 용납이 되던 시절이었다. 병원에 못 간 서민들을 문진하고 약을 처방해주기도 했다.
2000년 최 원장이 연로해지면서 병원 문을 닫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아쉬워했다. 그저 단순히 병원이 문을 닫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식 정원으로 꾸며져 있는 아담한 마당과 우물, 그 누구보다 사람에 대해 진심이었던 원장 선생의 성품 등이 모두의 기억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의료기술이나 시설 면에서 훨씬 뒤떨어졌을 테지만 어렵고 가난한 시절, 고단한 육신을 어루만져주었던 공간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의료기술 속에 왜 이다지도 오래된 공간과 오래된 마음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사진제공=무한정보
예산읍 예산리에 위치한 대동병원은 1920년대 일본인 이또가 양의원으로 개업했다. 당시 징병된 군인들을 대상으로 검진을 하고, 각 초등학교 신체검사를 찾아가서 진료하기도 했다. 해방 후 고덕면 구만리 출신 최익열 원장(1914~1999)이 진료를 시작했다. 최익열 원장은 경성제국대학 의대를 졸업했다. 1950~60년대는 11개의 병실을 갖춘 병원으로 대지 1709㎡에 겹집으로 지어진 일본식 가옥이었다. 뒤편에는 창고동, 마당에는 일본식 정원과 콜타르를 입힌 목재로 된 담과 문이 있었다. 2000년 최익열 원장이 별세하기 전까지 진료가 이뤄졌다. 2015년 예산침례교회에서 부지를 매입해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순천병원은 이종대 원장이 진료하던 병원이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되면서 다친 많은 사람들이 순천병원에서 진료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예산에서 운영된 양의원은 순천의원, 대동병원, 중앙병원, 후생병원, 예산역 앞 병원 등 총 5곳이다.
예산리 50-1에 소재했던 순천병원은 1915년에 건축된 2층 목조건물로 2022년에 철거되었다. 예산읍 예산5리에 위치한 해동안과는 1926년 5월 7일에 오도영 원장이 개업했다. 극빈자에게는 무료시술을 하기도 했다. 오도영 원장의 6남 오성근 박사가 대를 이어 운영되다가 폐원했다. 1926년 6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해동안과 오도영 원장에 대한 미담기사가 실려 있다. 해동안과가 불과 개업한 지 한 달이 안 되었는데 일반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다고 밝히고 있다. 더불어 극빈자에게는 무료시술을 해줬으며, 아산에 거주하는 박효순 씨가 무료수술을 받고 오 의사가 준 눈이라며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부인병원 김효순 원장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남편의 고향인 예산에 정착해 1930년대 부인병원을 개업했다. 칠성전업 옆 현 편의점 자리에 위치했던 부인병원은 일본식 목조건물로 내부는 입원실과 일본식 정원이 있었다. 마당에는 도르레가 있는 우물이 있었다. 김효순 원장이 연로해지면서 1980년대 말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