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밑 빗소리와 함께 하는 은은한 풍미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예산양조주식회사, 두견양조주식회사

by 김보리

스무 살 이후 나는 애주가가 되었다. 소주에서 시작해 막걸리, 동동주, 양주, 맥주 등을 섭렵했다. 막걸리나 동동주는 다음 날 머리가 아팠고, 맥주는 소변만 자주 봤으며, 양주는 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나는 가장 대중적인 소주에 안착했다. 우리 집에는 주당이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 형제들도 술을 마시지 못한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불콰해지며 바로 잠에 곯아떨어진다. 다만 제사 후 음복은 했다. 스무 살 이후 나도 음복을 할 수 있었다. 소주에 익숙했던 입맛이 정종이 들어가니 고급스러운 맛이 느껴졌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소주는 돈이 있는 사람들이 마시는 술이었다. 지금의 소주는 희석식 소주다. 원료를 발효시킨 뒤 증류해 물을 섞어 제조하는 것이다. 술의 도수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 추세에 소주 가격은 상승하니 애주가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높아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골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집에서 술을 빚어 마셨다.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힘든 농사일을 하려면 알코올에 의지해 술힘으로 일을 해야 했다. 잔치가 열리는 날에는 술 없이는 불가능했으니 집집마다 술을 빚는 비법 아닌 비법들도 있었다. 그러나 1909년 일본이 주세법을 도입하면서 서민들은 단속을 피해 술을 땅에 묻거나 숨기는 일도 벌어졌다. 1995년 전통주 자가 양조가 전면 허용되기 전까지 서민들은 남의눈을 피해 술을 마셔야만 했다.


예산읍 주교리에 위치한 두견양조주식회사는 1975년 서산, 천안 등지의 양조장 사장들이 주주가 되어 설립한 양조장이다. 당진시 면천에서 두견주를 생산하던 박찬성 씨 외 15명의 주주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총회를 열었다. 2013년 두견양조주식회사를 인수한 1955년생 임의묵 사장은 스물여섯 살에 양조장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에 창립한 예산양조주식회사 이후 1960~80년대까지만 해도 예산읍내에는 이양조장, 금오양조장, 오가양조장에서 탁주를 생산했고 두견양조장에서는 약주를 생산했다. 현재 예산읍내 남은 양조장은 두견양조조식회사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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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제작된 두견양조주식회사 간판을 따라 양조장 건물로 들어섰다. 좌측 사무실에 들어가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회의실 간판이다. 1970년대에 유행한 고딕서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철제 책상마저도 1980년대에 사용했던 책상 그대로다. 창턱에는 술의 도수를 측정하는 시류체취기가 남아 있다. 마치 실험실에서나 볼 법한 도구다. 약주를 부어 알코올램프에 열을 가해 끓인 뒤 냉각시킨 시류에 증류수 100cc를 받아 온도를 맞춘 후 주정계를 이용해 도수를 측정한다. 약주의 도수는 10도가 넘지 않아야 한다. 지금도 임의묵 사장은 시류체취기와 주정계를 이용하고 있다.


사무실을 나와 양조장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는 술밥을 쪄서 식히는 증좌실이 있다. 한창 당시는 매일 술밥을 쪘지만 현재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한다. 우측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맨 안쪽부터 국실, 사입실, 제성실이다. 국실은 밑술을 만드는 곳으로 밀가루를 쪄서 박스에 담아 담요를 덮어 띄우는 공정이 이뤄진다. 이곳의 평균 온도는 40도 정도에 맞춰 놓는다. 설립 당시 바닥에 깔린 오래된 나무 바닥은 초등학교 복도에 있던 목재 바닥과 비슷한 모양새다. 시간의 더께를 안고 검게 바랜 빛을 내는 목재에는 말린 햇빛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사입실에서는 옹기 단지에 1차 밑술을 넣은 뒤 1차 사입제를 넣어 15일간 술을 발효시키는 공정이 이뤄진다. 성업 당시에는 모두 재래식 옹기를 사용했으나 현재는 고무통에 발효를 시킨다. 겨울이 되면 연탄난로를 피워 실내 온도를 맞춰준다. 사입실에 들어서니 비로소 술 냄새가 난다. 20여 개의 고무통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 속에 재래식 옹기 하나만이 두견양조주식회사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지막 제성실에서는 압축기로 술을 짜서 맑은술을 걸러내는 공정이 이뤄진다. 제성실에는 두견양조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사용했던 압축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육중한 돌의 무게로 술자루를 묶어 뚜껑을 닫고 눌러 짜내는 것이다. 술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인 주박은 과거에는 서민들의 먹을거리이기도 했다. ‘지게미’라고도 부르는 주박을 먹고 나면 얼굴이 불콰해질 정도의 취기가 올라오기도 했다.


양조장은 술을 생산하기 위한 상업적 건축물이다. 자가소비를 하던 주류가 주세법 도입으로 인해 돈을 지불하고 마실 수 있게 된 산업사회로의 이양을 보여주는 대표적 장소라 할 수 있다. 임의묵 대표가 근무할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경운기를 타고 와 잔치에 사용할 술을 사가지고 가기도 했다. 직원 4~5명이 하루 종일 근무했고 특별하게 집안일이 있는 경우만 쉬는 날이었다. 현재는 그저 되는대로 심심풀이 삼아 약주를 빚는다는 임의묵 사장은 정작 술을 한 잔도 마시지 못한다. 술을 마시고 싶어 한 잔 마시면 가슴이 벌렁거리고, 두 잔 마시면 콩콩콩 뛴다. 가끔은 술 빚는 냄새에 취하기도 한다.


두견주는 진달래꽃을 말려 술을 빚을 때 혼합해 빚는 술이다. 일제강점기와 1963년 정부의 양곡주 제조금지 조치로 사라졌다가 두견주 기능보유자인 박승달 씨가 조부 박성홍 씨 부친 박찬선 씨로부터 제조방법을 전수받아 1986년 면천 두견주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한국의 전통주, 정동효 편저).


현재 두견양조주식회사에서 생산되는 술은 두견주가 아닌 약주로, 밀가루와 전분당 등을 혼합해 발효시키는 방법이다. 두견약주의 첫맛과 끝 맛은 달다. 곡물로 제조했기에 술을 마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곡물의 은은한 달달함과 풍미가 지속되는 것이다. 이런 약주에는 안주도 과하지 않은 것이 좋다. 의외로 이런 약주에는 치즈나 달지 않은 과일 등이 궁합이 잘 맞는다.


나는 애주가이기는 하지만 주당은 아니다. 어느 정도 마시면 접을 줄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내 몸 하나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마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인천에 살 때였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철길 아래에 포장마차가 있었다. 주황색 갑바를 밀치고 들어가면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혼자 가는 날에는 간단하게 어묵과 소주 한 병, 지인과 가는 날에는 오도독뼈에 소주 두 병이다. 옆 자리에는 중년의 남자가 혼자 술을 기울이고 있다. 나도 혼자였다면 그 자리가 꽤나 어색했을 것이다. 지인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이 얼추 자정이 가까워지자 백열등 아래에서 아주머니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둘러 막잔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머니의 귀가를 도왔다. 지금은 포장마차를 흔하게 볼 수 없어 이래저래 아쉬운 기억이다.


반면 시골에는 주막이 있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삼거리나 면이나 군 단위 경계에 위치한 주막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피곤함을 달래주는 탁주나 약주를 한 잔 걸치고 다시 이동했다.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주막은 단지 술을 마시는 술집이 아닌 쉼과 휴식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신흥동에서 예산시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주막들이 즐비했었다. 주막에서는 거의 대부분 탁주를 마셨다. 탁주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캬~소리를 내뱉는 소리가 십리 밖까지 울려 퍼졌다.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니 애주가 역시 주막에서 나는 소리와 막걸리 냄새를 그냥 지나갈 일이 만무하다. 거기에 비까지 오는 날에는 주막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안주 삼아 마신다. 이제 모두 옛날 풍경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가 최고의 안주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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