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묵은 냄새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기무라기와공장, 예산 항아리집

by 김보리

예산읍 산성리에 거주하는 1929년생 이봉업 씨는 기와공장에서 가마 불을 때는 화부와 기와를 올리는 기공으로 일했다. 호적상으로는 1929년생이지만 실제 1927년생이다. 1943년 열여섯 살에 작은 아버지 고(故) 이창복 씨가 운영하던 기와공장에서 놀면서 자연스럽게 가마에 불을 때는 일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부친 고(故) 이영순 씨도 함께 일했다. 예산읍 발연리에 일본인 기무라가 운영하던 기와공장과 산성리, 역전 등지를 중심으로 기와공장 7개가 운영되었다. 기무라기와공장은 해방이 되면서 기무라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예산 사람이 인수해 운영되다가 1980년대 무렵 문을 닫았다.


우리나라 전통 기와는 좋은 흙에서 이물질을 제거하고 찰지게 반죽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반죽한 흙을 흙담 쌓듯이 쌓아 올린 후 흙자름줄로 흙의 가장자리를 반듯하게 잘라내고 기와의 너비만큼 하나씩 잘라낸다. 나무로 만든 와통에 삼베나 무명으로 감싸며 꼼꼼하게 고장시킨다. 와통에 붙인 점토판으로 4장의 암키와를 만들 수 있다. 하루 정도 말린 후 4장으로 분리해 ㅅ자 형태로 엇놓아 건조시킨다. 일차 건조가 된 기와는 가마에 넣고 불 조절을 하며 구워낸다.


이봉업 씨는 가마에 불을 때어 시커먼 연기가 빠지고 연한 연기를 막으면 그 연기가 기와에 베어 까맣게 구워졌다고 설명한다. 보통 집 한 채 짓는데 소요되는 기와를 제작하는데 3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이봉업 씨가 기술자로 알려지면서 자전거를 타고 온양온천 등지로 다니며 일하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이봉업 씨는 전북 이리에 위치한 기와공장에서 10년을 일했다. 이후 서산시 팔봉면과 아산 등지에서 공장 등을 운영하면서 여든 살까지 기와 만드는 일을 했다. 당시 하루 품삯이 보통 품삯의 두 배였다고 하니 그 노동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건축자재가 등장하면서 기와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시멘트로 제조하는 양기와가 등장하면서 조선기와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갔다. 예산읍 내 대부분의 기와공장은 1980년대 말 무렵 문을 닫았다. 건축에 대한 일가견은 없지만 전통 한옥 지붕의 부드러운 곡선은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한옥은 직선으로 뻗은 콘크리트를 허용하지 않는다. 유려하게 흐른 기와의 끝에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치미가 건축물의 위용을 말해주던 때, 이제는 오래된 사찰이나 궁월 등에서만 볼 수 있는 장식 기와가 되었다.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차의 움직이는 속도에 의해 직선이 아닌 사선으로 떨어질 때, 네모난 직사각형의 토기가 아닌 곡선의 기와를 따라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는 동그란 습기를 머금고 떨어진다. 덩달아 보는 이의 마음도 직선이 아닌 동그라미를 그리게 되는 풍경이다.


사진10-8-1.jpg 오리동 왕영자 씨 자택에 사용된 점토 수키와



15년 전 시골의 한 허름한 농가를 구해 시골살이를 시작했었다. 녹이 슬어버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에 작은 텃밭이 있고 좌측으로 외양간과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본채 옆으로는 농기구들을 보관하는 헛간이 있었다. 방 하나는 아궁이가 있어 혹여 구들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불을 피웠다가 연기만 자욱한 바람에 사용하지 못했다.


1년 동안 방치되었던 집에는 풀만 무성했다. 일일이 손으로 풀을 베어내고 어지럽게 쌓여 있던 전 주인의 물건들을 정리해 헛간에 두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작은 옹기 단지였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옹기는 표면이 반들반들했고, 그 내부는 오래된 사람의 묵은 냄새가 났다. 투가리도 있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구하기도 어려운 투박한 질그릇이다. 깨끗하게 닦아 동치미를 담으니 내 소박한 밥상에 근사한 그릇이 되어주었다. 물론 지금도 아껴가며 잘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예산상설시장 끝자락에 예산항아리집 빛바랜 간판이 있다. 올려다보지 않으면 고추집으로 알기 십상이다. 화분, 유리병, 가마솥, 양은솥, 식당용 옹기, 투가리, 분재용 옹기 판매 이외에도 작은 간판이 하나 더 있다. 태양고추집 방앗간 간판이다. 고춧가루와 잡곡 일절을 사고파는 이곳은 원래 항아리집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김석배 사장이 따뜻한 아랫목에서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한다. 1945년생 김석배 사장은 모친 고(故) 박기순 씨가 운영하던 항아리집을 스물여섯 살 때부터 함께 운영했다. 박기순 씨가 1930년대부터 시작해 50년을 운영했고 김석배 사장이 지금 자리로 이전한 것이 40년 전이니 족히 90년은 된 셈이다.


김석배 사장이 처음부터 항아리집을 함께 한 것은 아니었다. 9남매 중 셋째였던 김석배 사장은 열여섯 살 때부터 부친 고(故) 김현구 씨가 하던 생선장사를 물려받았다. 용달을 대절해 인천이나 속초, 부산 등지를 가서 생선을 가지고 왔다. 예산천 복개 전 나무다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생선장사를 하고 장날이면 한 차 가득 싣고 온 생선을 모두 소비했다. 당시만 해도 생선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건네주면 그만이었다. 지금처럼 손질해서 판매하지 않았다. 부친은 김석배 사장이 생선장사를 잘하게 되니 아들에게 물려주고 현재 예산상설시장 부근에서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모친은 옹기장사를 하면서 틈틈이 막걸리를 담아 판매하기도 했다. 식구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해야 했다. 가끔은 단속반에 걸려 벌금을 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만들어 판매했다. 항아리집을 운영하면서 오가면에서 이의석 씨가 운영하던 옹기공장에서 옹기를 가져왔다. 한창 김치를 많이 담을 때는 집집마다 100 포기 이상은 담갔다. 당연히 김치냉장고가 없으니 항아리는 필수였다.


항아리는 크기순으로 대자리, 세두자리, 짝단지, 팔개단지로 구분한다. 흔히 김칫독으로 사용하는 항아리가 대자리다. 1970년대에만 해도 항아리 가격이 1만 2000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100만 원에 가깝다. 좋은 항아리는 200년이 된 것도 있다고 하니 전통옹기의 내구성이 얼마나 좋은 지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뒷마당에 땅을 파서 김칫독을 묻고 담근 김치를 차곡차곡 쌓아두면 겨우내 가족들 먹을거리였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살짝 얼은 김치를 베어 물면 아삭한 식감의 김장김치가 완성된다. 항아리는 김치뿐만 아니라 각종 장담을 때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지금도 장을 담그는 가정에서 옹기는 필수품이다. 장독대에 보관된 항아리를 젖은 수건으로 부지런히 닦아내는 이유도 옹기를 오래 보관하고 장이 옹기 안에서 맛있게 숙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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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매년 정월이 되면 장을 담았다. 메주콩을 삶으면 우리 형제들은 바구니 앞에 빙 둘러앉아 콩을 집어 먹었다.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누군가 방귀를 뀌어대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깔깔 대며 웃고는 했다. 마당 뒤편 장독에는 간장, 고추장, 된장 등이 어머니의 손길과 함께 익어갔다. 시판되는 장들이 나오기 시작하고, 어머니도 가게에서 사다 먹는 일에 익숙해졌다. 이래저래 집에서 장 익어가는 냄새도 사라졌다. 편리함과 간편함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진 지금 우리는 과연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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