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김복섭양복점, 남권양복점
1950년대생 대부분은 일찍 기술을 배워 자립했다. 스물두 살이나 스물네 살이면 사장님 소리를 들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합법화된 기술훈련학교나 양성소 등도 많이 없었던 때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알아서 눈치껏 배워야 했다. 기술자 밑에 들어가 월급 한 번 받지 못하고 온갖 심부름을 했다. 때로는 두들겨 맞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나마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빠른 시간에 기술을 연마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 제대로 기술을 배운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가게를 열고 나와 가족을 위해 부지런히 일했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사라지는 업종도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양복점과 양품점이다.
김복섭양복점을 운영하는 김복섭 사장은 1953년생으로 열다섯 살에 천안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양복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실 사 오라고 하면 실을 사 왔고, 연탄불을 피우라고 하면 번개탄에 불을 피워 연탄불을 지폈다. 당시에는 연탄다리미를 사용했는데 연탄 위에 쉿덩어리로 된 판을 올려놓은 뒤 다리미를 싸개로 잡아 사용했다. 월급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심부름을 하던 청소년들을 ‘꼬마’라 불렀다. 꼬마생활을 하면서 기술자들이 200원씩을 걷어 용돈 쓰라며 내주기도 했다. 밥만 먹여줘도 다행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또래 친구들은 이발소나 공장 등에 취직하거나 기술을 배우러 상경했다. 김복섭 사장도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무작정 상경했다. 처음에는 보이는 양복점에 무조건 들어갔다. 들어갔다가 근무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사촌형의 소개로 명동에 위치한 휴스턴양복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처음부터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이후 유류파동이 생기면서 양복원단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양복기술자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김복섭 사장은 예산으로 내려왔다.
스물한 살에 광시면에 뉴휴스턴양복점을 개업해 대흥고등학교 교복 맞추는 일을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양복점을 운영하다 보니 어려움도 있었다. 그때 예산읍내에 있던 대동양복점에서 김복섭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곳에서 2년 정도 재단사로 일했다. 스물네 살에 입대해 스물일곱 살에 제대했다. 스물여덟 살에 본정통 삼선약국 근처에 허름한 가게를 임대해 김복섭맞춤 간판을 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기술자 4명을 두고 한 달에 3~40벌 정도는 양복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예산군에 양복점이 40여 곳일 정도로 성황이었다. 예산군대한복장양복협동조합에서 총무로 일하기도 한 김복섭 사장은 기성복이 등장하고 맞춤양복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반 기성 제작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후 화산세탁으로 간판을 달고 세탁업과 양복점을 겸업하고 있다.
예산읍사무소 근처에 위치한 남권양복점은 1978년에 개업했다. 1955년생인 김남권 사장은 열여섯 살에 대한복장학원에서 재단을 2년 동안 배우고 미미양복점과 대동양복점에서 봉제를 배웠다. 처음 기술을 배울 때만 해도 심부름 정도만 하고 정작 기술은 눈썰미로 알아서 배워야 했다. 심부름 일을 하면서 당시 500원 정도의 월급을 받으면 운동화 한 켤레 사고 친구들과 중앙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것이 낙이었다.
김남권 사장은 쌍송배기에서 처음 개업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 1979년이다. 결혼식이 있는 날이면 양복점은 더 바빴다. 신랑과 친척들에게 양복을 맞춰 주려면 적어도 5~6벌은 맞춰야 했다. 1960년대가 주문양복의 전성기라면 1980년대는 맞춤양복 전성기였다. 그 시대 맞춤양복 한 벌 쯤을 가지고 있어야 멋쟁이 소리를 들었다. 이제 양복점이 많은 손님들이 찾는 장소는 아니지만 남권양복점을 기억하는 손님들이 꾸준하게 찾는다.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그 시간들이 지나 생각하니 모든 일이 고맙다고 말하는 김남권 사장이다.
얼마 전 대동양복점이 가게를 정리하면서 오래 사용하던 쵸코와 한국양복100년사를 물려줬다. 한국양복100년사를 뒤적거리다 보니 양복기능사시험을 치르는 남성들의 진지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험을 보면서도 자신이 만들었을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재단을 하고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 기능직 시험에 합격해 자신만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자립을 꿈꿨던 수많은 이들의 꿈을 살짝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의류만큼 유행을 가장 빠르게 반영하는 것도 드물다. 가끔 나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뭐랄까, 조금 민망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눈길을 피해버리고 만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옷에 대한 개념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없는 경험이다. 하지만 과거 멋쟁이들에게는 나만의 맵시와 멋을 자랑하는 근거가 되어준 것이 맞춤양복이었다. 어떤 양복을 입는지가 멋쟁이 신사의 품격을 말해준다. 비록 기성복이 등장하면서 맞춤양복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간다고는 하지만 패션에 민감한 젊은이들에게 맞춤양복의 찬란한 부활이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