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연흥상회, 재성상회
연흥상회 연송정 사장은 1940년생으로 황해도 곡산에서 네 살에 가족들과 함께 내려왔다. 해방되기 전 부산에서 신의주와 만주를 달리던 기차를 타고 대술면에 정착했다. 연송정 사장 가족이 정착한 곳은 그야말로 산골짜기였다. 고구마 심고, 감자 심어 가족들이 먹었다. 그저 굶어 죽지만 않아도 다행이던 시절이었다.
장날이면 나무를 한 짐 해서 왔다. 나무를 팔아 손에 쥔 돈으로 가래떡 한 줄 사 먹으면 남는 것도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먹고사는 일이 어려웠다.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예산읍 사직동으로 이사를 왔다. 곡식 장사를 하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아 짐바자전거를 한 대 구입해 곡식 장사를 시작했다. 새벽밥을 먹고 이곳저곳 시골장을 다니며 잡곡을 사 가지고 와 오일장에서 팔았다. 가게 간판도 걸지 못한 채 허름한 가게를 얻어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3년 현재 위치에 연흥상회 간판을 걸었다. 그해 양곡소매업허가 제1-6호를 받았다.
장날을 맞아 가게 안은 단골손님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아주머니 2명과 아저씨 1명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비집고 나도 엉거주춤 앉았다. 가게 좌측에는 담요를 깔은 아랫목이 있고, 우측으로는 작은 책상과 오래된 판수동저울이 있다. 판수동저울은 서울 청계천에서 정기화물을 이용해 2만 원에 구입한 것이다. 5kg, 20kg, 50kg의 저울추가 있어 곡식의 무게를 재는 일에 사용된다. 그 외 공간은 모두 곡식 차지다. 지금이야 포대를 이용해 곡식을 담지만 예전에는 짚으로 만든 가마니에 담았다. 가마니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삭아져서 곡식을 오래 보관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다 가마니를 사용했고 다른 방법도 없었다.
가게 안 곡식 자루에는 쌀부터 시작해 현미, 수수, 각종 콩 등이 가득이다. 이제 이 곡식이 전부 팔리는 날 즈음이면 가게 문을 닫지 않을까 싶다고 연송정 사장이 말한다. 쌀이 귀하던 시절, 반찬은 없어도 밥공기 가득 고봉밥을 퍼서 그야말로 밥심으로 버티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한 됫박 씩 사러 오는 사람도 드물다. 짐자전거에 한 가마니를 턱 얹어 배달하기도 힘든 나이다. 이래저래 아쉽기만 한 시절이다.
예산읍 주교리에 위치한 재성상회는 1980년대 초반에 문을 열었다. 아동복과 여성복, 이불 등을 서울에서 가져와 팔았다. 설빔과 추석빔을 마련하려는 젊은 부부들로 넘쳐났던 시절이었다. 김용만. 조재성 씨 부부가 운영하는 재성상회는 지금도 아침 7시 30분이면 가게 문을 연다. 일하러 나가는 노동자가 혹여 작업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어르신들이 일찌감치 병원에 들러 가는 길에 가게 문이 닫혀 있으면 섭섭하기 때문이다.
옷 장사는 계절 장사다. 계절에 앞서 그때에 맞는 의류로 바꿔 진열해야 한다. 아동복은 치수별로 구색을 맞추고 있어야 손님들 요구에 맞출 수가 있다. 유행에 민감한 품목이다 보니 진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5일에 한 번은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에서 옷들을 가져왔지만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간다. 의류 역시 인터넷을 통해 구매가 이뤄지기에 재성상회를 찾는 손님들 대부분은 단골손님인 노동자와 노인들뿐이다. 품목 역시 작업복과 내복, 가방, 의류, 이불 등으로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
역전장날이면 재성상회 밖 매대는 김용만 씨가, 가게 안은 조재성 씨가 담당한다. 김용만 사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베개커버를 들고 온 한 손님이 누가 떼어가도 몰르겄어, 라며 돈을 건넨다. 역전시장이 설립될 당시부터 운영되었던 오래된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재성상회와 순댓집, 신발가게만이 40년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저녁 6시 30분에서 7시가 되면 재성상회 문이 닫히는 시간이다. 해가 짧은 겨울, 겨울 땅거미가 내려앉은 도로에는 재성상회 건너편 예산역만이 환한 불빛을 쏟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