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보다 사람이 많았던 골목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칠성전업, 어씨네금방

by 김보리

예산에서 택시를 운영하던 사람치고 칠성전업 사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금 하나은행 자리에 차부가 있던 시절,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칠성전업 사거리를 지나 시장에 갔다. 너무 많은 사람들로 인해 교통경찰관이 나와 정리를 할 정도였다. 연탄차가 지나가려면 추녀를 건드려 부서지는 일도 빈번했다.


칠성전업은 1963년생 김영운 사장의 조부인 고(故) 김종목 씨가 1970년대 중반까지 한청이발관을 운영하던 곳이다. 이후 1979년 부친 김병태 씨가 칠성전업을 개업했고, 1994년부터 김영운 사장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농어촌전기가 개통된 시대로 각 면 단위에 전기 설비를 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지금이야 온갖 종류의 다양한 전등이 나오면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가게를 찾는 손님들도 덩달아 줄어들었다.


칠성전업 앞 LG디지털가게는 유유양복점과 현대이발관, 아리랑사진관이 있던 건물이었고, 옆 편의점 자리에는 부인병원이 있었던 목조건물이 있었다. 맞은편으로는 중국인이 운영하던 동생춘이, 편의점 앞 떡집은 대창양복점이 있었다. 대창양복점은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지금은 지붕 형태를 제외하고는 모두 리모델링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가게 안에서 밖을 바라봤다. 오가는 사람도 드물었고 가게를 찾는 손님도 누전차단기를 사 가는 사람만이 왔다. 김영운 사장은 가게를 3대가 이어가기 어렵다며 자신의 아들이 이 가게를 물려받을지 모르겠다며 말을 흐렸다. 칠성전업 사거리 주변을 걸어보았다. 묵묵하게 가게를 지키고 있는 가게도 있지만, 임대 안내문만 덩그러니 붙어 있는 가게가 더 많았다. 차보다 사람이 더 많았던 골목에는 예전보다 도로가 좀 더 확장되어 끊임없이 차들이 오간다. 이제는 사람보다 차들이 많은 골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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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어오는 골목 사이에 어씨네금방이 있다. 마침 어진용 사장이 묵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진용 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내가 이 집 귀신이야, 라며 가게 안으로 안내했다. 가게 안은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정도의 통로를 제외하고는 온갖 물품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돈은 안 되고 망하는 것만 연구한다는 어진용 사장의 어씨네금방은 시계, 저울, 금고 수리 전문점이다.


1929년 어진용 사장의 부친 어인태 씨가 경기도 포천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청주 문의면이 고향인 어인태 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예산으로 피난을 왔다. 어진용 사장이 4살 때였다. 처음에는 대술면 장복리에서 10개월, 대흥면 대률리에서 잠시 거주하다 예산읍내로 나와 1958년 현재 위치에 서울금고수리, 예산공업사를 열었다. 당시 서울 상공부 직원이 와서 여기가 예산이니 ‘예산공업사’라고 하자며 작명을 해주고 갔다고 한다. 어인태 씨는 일본 세이코시계에서 일하던 일본인에게 시계수리기술을 배웠다. 장항 일대 금고 수리 출장을 다니고, 인근 당진, 태안, 홍성, 청양 등지로 계량기검사에서 불합격한 저울을 수리하러 다녔다.


막내였던 어진용 사장은 어릴 때부터 시계를 가지고 놀았다. 중학교 때 이미 시계수리를 마스터한 어진용 사장은 기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예산농업고등학교 원예과에 진학했다. 어진용 사장의 시계에 대한 열정은 직접 시계를 제작하겠다는 의지로 변화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벽시계는 생산되었지만 손목시계는 만들지 못했었다고 한다. 어진용 사장은 자신이 직접 만든 손목시계 주요 부품에 대한 평가를 받기 위해 스위스 바쉐론 콘슨탄틴에 보냈다. 1968년 8월 9일 답신이 왔다.


답신에는 우리는 당신 공방의 장비를 보여주는 두 가지 디자인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당신이 보내준 시계 속도를 조절하는 톱니바퀴는 여기서 검사필을 받았고 우리는 이 탁월한 작업과 제작 품질에 대해 축하한다. 당신의 질문에 기꺼이 정보를 제공한다. 직경 흔들림이 중심점 크기에서 1.5mm 가야 하며, 단동요(시계 세로 방향으로 자유로이 운동할 수 있는 틈) 방식은 단보석으로부터 2~3mm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어진용 사장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1972년 시계기능공 1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듬해 저울검사수리자격증도 취득했다. 1989년 어인태 씨가 작고하고 자연스럽게 어진용 사장이 가업을 이어받았다.


1981년 예산공업사 옆으로 어씨네금방 간판을 새로 걸고 1990년 현재 건물로 리모델링 했다. 어진용 사장은 어씨네금방이 일종의 예명이라고 설명한다. 어진용 사장은 금고나 저울에 들어가는 부속품 생산보다 시계 부품 제작에 매달렸다. 간단한 시계 수리 손님이 찾아오면 인근 가게로 되돌려 보내고 자신은 기꺼이 어려운 수리를 담당했다. 30년 전에 판매했던 시계 배터리 교환은 지금까지도 무료다. 다가오는 봄까지 창고 안 가득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독립시계 연구와 제작에 몰두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어진용 사장이 오래된 독일산 벽시계의 종소리를 개발했다며 들려줬다. 땡, 땡, 땡 울리는 일반 벽시계 괘종시계와는 사뭇 다른 소리였다. 심연을 흔드는 것 같은 청량하고 맑은 종소리가 가게 안을 가득 메웠다. 시계에 미친 어진용 사장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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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 밥을 먹고, 점심때가 되면 밥을 먹고 일을 하며, 저녁이 되면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며 잠을 잔다. 거의 모든 인간의 평범한 일상이 시곗바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러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하루’라는 시간 속에 나는 지금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이렇게 쓸데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쌓여 내 인생이 되는 것인지,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맞는 일인지, 뭐 이런 종류의 조바심과 씁쓸함, 초조함이 들기도 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확인하다 보면 무언가 시간에 쫓기는 기분도 들었다. 지금은 조금 무디어졌다. 그저 그런 시간들이 나의 곁을 의아하게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기도 한다. 나에게는 그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일 뿐이지만 누군가에는 미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세상의 경이로움과 무한함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씨네금방 문턱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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