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

사라진 기억, 오래된 현재-(구)영진주단 현필원

by 김보리

어릴 적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맞추어준 한복을 입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키 순서대로 나란히 서 사진을 찍고는 했다. 소매와 한복 깃은 색동으로 되어 있는 초록색 저고리에 진달래빛 치마와 색동고무신을 신었다. 유독 큰언니만이 흰색 색동저고리였다. 명절이 되면 당연히 한복을 입었지만 중학교 이후부터는 입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에 맞춰 네 벌의 한복을 매번 맞추는 일이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한복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다소곳이 앉아야 하는 일도 어려웠고, 겹겹이 입어야 하는 한복이 한마디로 귀찮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성인이 되어 한복을 맞춘 적이 있었다. 아버지 환갑잔치를 앞두고 형제들은 한복집에 가 한복을 맞췄다. 위아래 진분홍빛 한복을 입은 나를 거울을 통해 들여다봤다. 무언가 어색했다. 바로 안경을 썼기 때문이었다. 안경을 쓴 한복 입은 여자의 모습은 낯섦 그 자체였다. 딱 한 번 입고 세탁 후 바로 상자에 보관된 한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직도 장롱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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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정통 거리를 오가며 고운 한복이 걸려 있는 현필원 앞을 자주 왕래했었다. 여느 날과 같이 그 길을 걷다 우연히 원단을 만지고 있는 유태성 사장이 보여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필원은 본정통에서만 70여 년을 지켜온 가게다. 1955년생 유태성 사장의 부친 유영진 씨가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다. 예산군 광시면이 고향인 유영진 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1950년 현재 위치에 영진상회 간판을 걸고 포목점을 시작했다. 원단장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복 생산을 겸하게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각 결혼과 잔치, 마을 부녀자들 나들이에서 한복은 필수였다. 한복이 성황을 이루면서 영진상회 이외에도 김동섭상회, 김동열상회 등 한복집과 겸업하는 포목점들이 생겨났다. 유태성 사장은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하면서 졸업 후 스물여섯 살부터 부친과 함께 영진상회를 운영했고, 부인 현필원 씨 역시 시집을 오면서 영진주단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합류했다. 유태성 사장은 직접 원단 디자인을 해서 생산하는데 집중했고 가게에서 장사를 도맡아 하던 사람은 부인 현필원 씨였다. 주로 단골손님들이 많았고 할머니에 이어 3대가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맞춤양복점과 함께 한복 역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침체기를 맞았다. 유태성 대표는 한복대여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한복 한 벌 단가가 결코 저렴하지 않고 자주 입는 옷이 아니다 보니 오히려 대여를 해주는 편이 좀 더 나았다. 2005년 경 프랜차이즈 사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면서 상호를 부인 이름인 ‘현필원’으로 바꿨다. 이후 유태성 사장의 아들 유해동 씨가 가업을 승계받아 천안에 루향한복을 개업했고, 딸 유선아 씨가 한복 원단 온라인 쇼핑몰 실크드림을 개설했다. 유태성 사장은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산수화나 민화 등의 문양을 디지털화시켜 생활용품 디자인으로도 확대할 계획에 있다고 했다.


가업을 이어간다는 일은 자부심을 이어가는 일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문화에 발맞추어 우리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맞는 디자인 개발과 마케팅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단순히 자부심만으로 이어가기는 어렵다는 의미기도 하다. 흰색 간판에 금색으로 도장된 백 년 가게 현필원이 겨울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쇼윈도에는 고운 한복의 자태가 현필원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줬고, 가게 내부 다양한 색상의 한복은 마치 무지개를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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