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마민족의 이동(2)
다음은 한국영토학회 회장이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신용하씨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참고 했음을 먼저 밝힌다.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부여족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이 용맹한 기마민족이었다는 점이다. 우선 북만주 일대는 추위로 인해 농작물 재배가 어려운 지역이었으며, 이는 근처(?)에 존재했던 고구려와 비슷한 상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고구려가 더 남쪽이었으니 부여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은 사냥과 목축, 그리고 일부의 농업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부여에 대하여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즉, 부여는 왜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캅사스 지방까지 이동했고, 그곳에서 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구글 지도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경로는 우선 위와 같은 두가지 방법이 있다.
물론 볼가강의 위치는 현재의 불가리아와는 꽤 거리가 있는 편이다.
강의 위치가 변하지는 않았을테니 짐작하건데 불가리아 제국의 영역이 빼앗기고 밀리며 변한 것이라고 보아야겠다.
이 볼가강 지역에 살던 민족을 부여족(불가족((Bulgars))이라고 하는데 이들에 대한 설명을 위키 백과를 통해 찾아보면 꽤 주목할만한 내용이 등장한다.
불가르족(불가르족, 불가르족, 볼가르족, 볼가르족, 볼가르족)은 7세기에 폰토스-카스피 스텝과 볼가 지역에서 번성했던 투르크의 반 유목민 전사 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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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유라시아 스텝의 군대 칭호, 조직, 관습, 그리고 이교도 샤머니즘과 하늘신 탕라에 대한 믿음을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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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폰토스 불가르족은 7세기에 볼가 강으로 이주하여 볼가 불가리아를 세웠으며, 13세기까지 그들의 정체성을 잘 보존하였다. 볼가 타타르족과 추바시족은 볼가 불가르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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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혼합"은 불가르족이 더 동쪽에서 이주하기 전에 일어났을 수 있으며, 산핑첸과 같은 학자들은 음운학적으로 유사한 이름을 가진 내아시아의 유사 집단들에 주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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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문제의 신은 튀르크 최고 하늘의 신 텡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중국어에서는 젠리(Zhenli)로, 튀르(크어에서는 탕가라(Tangara)와 텐게리(Tengeri)로 표기되며, 이는 가장 오래된 투르코-몽골어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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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년, 동고트인들에게 패배한 사비니아 군대의 10,000명의 훈족 기병이 불가르족이라고 믿어진다. / 539년과 540년에 프로코피우스는 강력한 훈족 군대가 다뉴브 강을 건너 일리쿰을 초토화시키고 아나스타시안 장벽에 도달했다고 보고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먼 거리를 이동한 것은 그들이 기수였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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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숭배했기 때문에 불가르인들은 남쪽을 선호했다. 그들의 주요 건물과 사당은 남쪽을 향했고, 동쪽에서 들어오는 경우는 적었지만 남쪽에서 들어오는 유르트도 있었다. 발굴 결과 불가르인들은 고인이 남쪽을 향하도록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한 채 남북 축에 시신을 묻었다.
이처럼 고대 불가족은 부여와 같은 유목 민족이었으며, 하늘신(tengri)를 믿었던 종족이다.
거기에 더해 튀르크와 몽골인의 민족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짧은 시간 안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엇던 기마민족이었으며, 단군조선과 마찬가지로 하늘신(환인)을 섬기며, 남향으로 집을 짓기도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