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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Apr 04. 2022

형제의 나라 불가리아.1

1. 기마민족의 이동

1. 기마민족의 이동


1) 단재 신채호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대륙 백제설에서도 언급되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하여 먼저 짤막하게나마 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1880년에 태어난 신채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형을 잃었지만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일종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의 수재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할아버지의 소개로 당시 학부대신이었던 신기선의 집을 드나들며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박은식을 만나 유교의 한계를 깨달으며 개화사상을 섭렵하게 된다.

<황성신문>의 기자로 들어가지만 을사늑약으로 사장이었던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쓰며 신문사가 폐간을 맞게 되었고, 이후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때 그는 우리 역사 속 위인들의 전기를 편찬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키우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일제가 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 등을 편찬하며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시작하자 신채호는 이에 반발하며 민족주의에 입각한 자주적이고 실증적인 한국고대사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것은 '국사(國史)는 곧 국혼(國魂)'이라는 박은식의 역사 인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후 중국과 러시아 등을 돌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그는 당시 그 지역에 묻혀 있던 고구려나 발해의 유물들을 답사하면서 자신의 역사관에 바탕을 다지게 된다. 

이러한 계몽운동 뿐만 아니라 무장투쟁까지 불사하던 신채호는 무장군사활동을 벌이던 독립군 단체 보합단의 뒤를 이은 제이회보합단을 조직하기도 했으며, 의열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2)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선생은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를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1924년에 집필된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씌어진 본격적인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이 시기에 그가 이미 서구의 근대 역사이론과 사회과학이론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래(舊來)의 한국사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하여 한국사의 자주적 체계화를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선생의 포부와 구상이 잘 드러난 역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많은 지식인들이 이 [조선상고사]의 내용을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며 폄하하고 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바탕으로 한 식민사관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바탕으로 한 역사관은 물론 미국이나 유럽 각지의 나라들도 자신들의 역사를 과장하기 바쁜데 우리는 우리 역사를 외면하는 것을 넘어 비하하고 축소하는 것이 '겸손의 미덕'이라고 교육받아 왔다.

어느 것이 옳다고 지금 당장 말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라는 신채호의 격렬한 문제의식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선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신채호의 [낭객의 신년만필] 중


우리는 우리가 역사에서 눈을 돌린 사이에 사라진 역사를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든가, 흔히 말하는 국뽕이라든가, 실증적인 사료가 부족하다근가... 하는 문제들은 이후에 다룰 부차적인 문제들이다. 먼저 모든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긁어 모은 다음에야 다시 선별 작업을 거칠 수 있는 것이지, 온갖 잣대를 들이대며 시작부터 막아선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시간에도 조선상고사에 등장하는 부여와 불가리아의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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