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백제는 어디에 있었나?(2)
앞서 살펴본 지리적 요소 말고도 현재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씨를 통해서도 백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라 안에 8대 성씨가 있는데, 사(沙)씨, 연(燕)씨,
리(칼刀가 셋인 글자, 또는 협 協)씨, 해(解)씨, 진(眞)씨, 국(國)씨, 목(木)씨,
묘(苗)씨 이며 백제의 왕족의 성은 부여(夫餘)씨라."
- <북사(北史)>, ‘백제편’, <수서> ‘백제조’
2000년도에 발표한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 국(國)씨는 2,182명, 연(燕)씨는 3,549명, 진(眞)씨는 1,579명, 묘(苗)씨는 61명인 반면에, 사(沙)씨나 리(또는 협)씨, 해(解)씨, 목(木)씨, 부여(夫餘) 씨는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백제가 망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한 나라를 대표하는 8대 성씨 중 절반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성씨들이 중국에는 다수 존재합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생각해보자면 결국 한반도 백제와 중국 대륙 백제, 왜의 백제가 공존하고 있었고, 백제의 멸망과 함께 나머지 4개의 성씨는 중국으로 귀화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제와 왜(일본)과 관련된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일본의 옛 수도인 나라현에 위치한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칠지도’라 할 수 있습니다.
1878년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지는 금족지가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칠지도가 발견된 것입니다. 칠지도는 가운데 칼날을 축으로 좌우에 3개씩 나뭇가지처럼 칼날이 솟아 있는 약 75cm 가량되는 칼이었습니다. 그리고 칼의 표면에는 금색으로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바로 이 글자가 백제와 왜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증거가 됩니다.
‘14대 천황 신공황후가 신공 49년(369), 가야를 정벌하고 백제와 신라까지 지배하였다.
그리고 3년 뒤인 신공 52년에는 백제의 사신이 조공을 다짐하며
‘칠지도’와 함께 여러 가지 보물을 바쳤다.’
- <일본서기>
일본인들은 <일본서기>의 내용이 진실이며, 이 칠지도가 한반도를 정벌한 자신들의 신화가 실제 역사라는 것을 증명해 줄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학계에서도 칠지도가 백제가 일본에게 바친 헌상품이라는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칠지도에 새겨진 글씨는 무엇이길래 일본인들이 이처럼 흥분했던 것일까요? 이 칠지도에는 앞면에 34자, 뒷면에 27자, 총 61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물론 오랜 세월과 함께 녹이 슬어 알아볼 수 없는 부분들도 있지만, 우선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作)祥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여기서 태화 4년은 서기 369년으로 백제 근초고왕 24년이고, 이는 <일본서기>에서 표현한 신공 49년과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당시 일본이 가야를 정복하고,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지배한 것일까요?
문제는 뒷면에 새겨진 27글자에 있습니다.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칼의 앞면에 쓰인 후왕과 뒷면에 쓰인 왜왕은 동일 인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왕이란 것은 결국 제후국의 왕을 일컫는 말로 백제가 일본에 헌상했다는 일본의 주장과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백제가 22개의 담로(제후국)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傳示後世(전시후세):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는 분명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는 형태입니다. 그것도 백제 왕이 아닌 왕세자가 보내며 적은 글입니다. 고대 국가에서 무기는 왕이 신하에게 믿음의 표시로 하사하던 물품입니다. 따라서 수많은 소국으로 나뉘어 있던 일본 열도에 근초고왕이 야마토 지역의 수장에게 칠지도를 하사하여 그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해 준 것으로 보는 편이 합당합니다.
특히나 근초고왕의 경우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격해 들어가 고국원왕을 전사 시킬 정도의 정복 군주였습니다.
‘366년, 백제는 일본 사신을 초청하여 오색채견 각 한 필, 각궁전, 그리고 철정 40매를 주었다.’
- <일본서기>
<일본서기>에서 백제에 대한 표현을 살펴보면, 근초고왕이 일본 사신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 물품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철정인데, 철정이란 철제물품을 만드는 재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일본은 스스로 철정을 채굴할 능력이 없었고, 모두 가야에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칠지도는 ‘백 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칼날이 7개에 표면에는 금박으로 글씨까지 새긴 매우 정교한 제품이었습니다. 칠지도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제련 기술과 부를 지니고 있던 백제를 칼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일본이 정복하고 다스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즉, 백제와 일본 사이의 기술력의 차이가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양직공도>
<당염립본왕회도>
게다가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양직공도>(6세기) 나 그 내용을 간략하게 모사한 <당염립본왕회도>의 그림을 살펴보아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절들은 단정한 옷차림과 신발을 신고 있는 반면에 일본의 사절은 배와 다리가 드러나는 허름한 옷차림에 맨발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백제와 일본은 기술력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그 격차가 심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칠지도’는 일본이 가야를 정복하고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는 일본의 신화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제가 자신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일본에게 하사품으로 내려준 증거라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타당합니다.
즉,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짐작해 보건대 백제와 그 제후국은 반도 백제를 기준으로 대륙과 열도에 넓게 퍼져 있었다는 것이 합리적 추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신앙적으로 믿는 것은 곤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을 지니고 있고, 그 기준에 맞추어 역사와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시기의 다른 역사서와 비교하며 보다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우리 역사를 다시 들여다 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왔던 우리 역사와는 조금 다른 모습의 역사를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