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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Mar 22. 2022

우리가 몰랐던 삼국시대 이야기.4-(1)

4. 백제는 어디에 있었나?(1)

4. 백제는 어디에 있었나?


1) ‘백제'의 의미

백제라는 말은 百家濟海(백가제해). 즉, ‘백(100)가(家)문이 바다를 건넜다.’는 중국 역사서인 <수서>의 말처럼 100개의 가문이 바다를 다스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서 전달해 드렸던 ‘백제 바로 알기’에서도 백제가 <양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를 ‘22개 담로(다물)로 이루어진 연맹 국가’ 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왜 100개의 가문이 22개로 축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백제는 처음 100개의 가문으로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에는 바다를 건너 요서·산동·강소·절강 등지를 경략하고 왜에까지 이르렀다는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다음의 기록들을 함께 살펴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백제의 영토는 서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양자강 지역)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접하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일본)에 이른다.’

                                                                                                                   - <구당서> ‘백제전’


<구당서>의 기록에 따라 현재의 구글 지도를 검색해 보면 다음과 같이 양자강 유역과 한반도의 서쪽, 그리고 일본의 일부 지역이 백제의 영토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강병 100만으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연(燕),제(齊) 노(魯)등지를 흔들어 지나 대륙의 큰 좀이 되었으며,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의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시기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대략적으로 춘추전국시대에 5패와 7웅으로 불리던 나라들의 위치는 다음의 구글 지도와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백제의 위치 역시 아울러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위나라는 100만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그러나 백제는 이를 대파했다.’

                                                                                                                           - <남제서>


위나라는 중국의 삼국(위, 촉, 오)을 통일했던 왕조입니다. 따라서 엄청난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강국입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멀쩡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기병 100만으로 백제를 공격했다는 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백제의 위치에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구려가 자신들의 땅을 기병 100만이 지나가도록 허락했을 리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기병이 100만이면 여기에 따라붙는 보병이나 물자 보급 인원이 그 2~3배에 이른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 정도의 인원이 그것도 고구려와 대륙의 북부에서 경쟁하던 중국 세력이 약 2~3백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와 마찰없이 내륙을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병 100만을 배에 태워 넘어간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제가 중국 대륙 안에 있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내용입니다.



‘백제라고 하는 나라는 후에 점정 강하고 커져서 여러 작은 나라를 병합하고 그 나라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 (3세기 중엽)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백제 역시 요서, 진평의 2군을 점령하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

                                                                                                           - <송서>, <양서> 백제전 


‘백제는 처음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를 취해 요서, 진평 두 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 <통전>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앞서 위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기록처럼 백제가 단지 고구려 밑 한반도에만 자리잡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백제의 경우에는 해상 전력이 뛰어났으니 배를 동원했을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



‘함형 원년(670년) 7월에 이르러 입조사 김흠순 등이 와서 경계선을 그으려 하는데 지도를 검사하여, 백제의 옛 땅은 전부 돌려주라 하니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고 태산이 아직 숫돌과 같이 되지 아니하여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3, 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으니 (하략)’

                                                                                                          - <삼국사기> ‘신라국본기’


<삼국사기>에는 또 한번 백제의 위치를 짐작할 만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바로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이 당나라에 가서 국경선을 결정 짓는 자리를 묘사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백제의 옛 땅이 황하와 태산에 거쳐 있어서 당시 중국 세력과 3, 4년에 한번 주고 한번 빼앗는 전투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여태까지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료에서 말하는 백제의 위치가 모두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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