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외래 문화에 흔들린 시대
삼국 혹은 오국시대인 이때부터 한반도에는 외래 문화가 전래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유교와 불교입니다.
유교의 경우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기원전 5)에 난립했던 제자백가의 사상 중 하나인 유가를 뿌리로 하고 있는데 은나라에서 시작되어 주나라 때 발전하였습니다. 유교의 경우 한자 문화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불교는 기원전 5세기에 탄생한 석가모니(부처)의 사상을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기에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문화적 이질감을 지니고 있던 불교는 삼국의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며 폭넓게 민간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 2년(37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를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전해 주며 불교가 고구려에서 인정받게 됩니다.
이때 고구려는 삼론종이라는 종파를 발전시켰는데, 삼론종은 남북조시대 말기에 성립하여 수나라 때 번창한 종파입니다. 이것들은 고구려, 백제, 왜까지 전파되었지만 대부분 고구려 승려들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중국 삼론종을 집대성한 사람이 고구려 출신 승랑이었고 그가 일본에 삼론종을 전파합니다. 삼론종의 시조가 된 이도 역시 고구려의 승려 혜관으로 고구려가 중국의 불교를 들여와 자신들의 것으로 다듬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고구려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기존의 사상을 불교로 대체하였는데, 이는 기존 연맹체제를 끝내고 단일집권체제 확립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경우는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의 입국으로 불교가 인정됩니다.
백제 역시 자신들의 방식으로 불교를 수용하고 다듬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륵 불교입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사후 현세에 나타난다고 알려진 부처로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분파되어 나온 백제는 고구려에 비해 전통의 굴레가 약한 편(개척자)이었습니다. 덕분에 전통 사상과 불교 사이의 갈등도 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백제의 경우에는 온조와 비류라는 두 형제가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왕권이 강력한 편이었습니다. 백제 왕실은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단(교정일치)으로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즉, 왕이 곧 부처라는 형태의 불교를 주장한 것입니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에는 왕족이 불교를 왕권 강화의 수단 정도로 생각한 반면, 백제는 26대 성왕 이후에는 왕족 역시 불교에 심취하였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에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불교 자체의 진출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늦었습니다. 고구려보다 약 50여 년이 늦은 눌지왕(417~458) 시절 신라에 전해졌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로부터 다시 100여 년이 지난 법흥왕 14년(527년)에 일어난 이차돈의 순교 덕분이었습니다.
즉, 그때까지 불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어둠에 숨은 종교였던 것입니다. 그 까닭은 신라 호족 세력들이 자신들만의 민간 신앙을 옹호했으며, 특히나 불교가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전래된 불교는 신라에서는 호국 신앙으로 자리잡습니다. 협소하고 폐쇄적인 지역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통합시키며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확립하여 내부 질서의 안정을 이끌어냈습니다.
결국 신라는 불교를 호국 신앙으로 삼으며 법흥왕 다음 진흥왕 때 전성기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먼저 고구려의 경우 소수림왕 때 전래되기는 했지만 광개토대왕 이전에는 전통의 사상을 존중하며 통일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 이후에는 불교, 도교, 무속 신앙의 혼재하며 혼란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불교와 도교, 무속 신앙을 모두 인정하면서 연맹 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데, 이것은 바로 종교적인 혼란이 원인이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문화적 통합력을 잃게 되었고, 이것은 국력의 약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문제점은 백제에도 드러나게 됩니다. 백제의 경우에는 불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내세를 중요하게 여긴 미륵 불교의 영향으로 백제 사회는 정체를 맞게 됩니다.
백제인들은 현재에 만족하며 진보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고, 후기로 갈수록 사치스러워지며 강건함과 패기를 잃고 화려함과 세련됨을 추구하게 됩니다.
즉, 고구려가 전통 사상과 외부에서 유입된 불교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면, 백제는 전통의 사상을 버리고 외래의 사상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들의 힘을 갉아 먹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신라는 자신들의 문화에 외래 문화를 주체적으로 융합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삼국을 통일하는 정신적, 문화적 바탕으로 자리잡으며 신라의 힘을 키우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신의 도가 있는데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 그 도의 연원은 선가의 사적에 잘 밝혀져 있으며, 사실상 세 가지 사상(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원리는 모두 포함하고 있다.’라는 최치원의 말처럼 신라는 유, 불, 도라는 외래의 사상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품에 안고 융합했던 것입니다.
결국,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외래 문화인 불교를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신라는 좋은 본보기를 보였고, 그렇지 못했던 고구려와 백제는 바로 이 불교로 인해 스스로의 힘을 깎아 먹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