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여의 기상을 간직했던 불가리아
둘째 아들 코트라그가 볼가강 유역에 고추불가국을 세우는 동안 셋째 아들인 아스파르흐(Asparukh) 역시 흑해를 지나 발칸 반도에 도착한다.
현재 발칸 반도와 소피아성의 위치
당시 그 지역을 세력권 안에 두고 있었던 비잔틴 제국은 680년 불가족의 퇴거를 명령했지만 이들의 협상은 결렬되었고, 결국 681년 불가족과 로마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 이때, 불가족 아스파르흐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 벌어진 비잔틴 제국과의 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세웠다. 이때 나라 이름을 불가리아로 정한 것은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었다. 여기서 불가족은 불가리아의 귀족이 되었고, '보야(Boyar)'라고 불렸는데 이는 '부여'의 발음이 변형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시리며점차 강대국으로 발전했다.
불가리아 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1세가 전사했다.
불가리아 제국은 결국 발칸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며 비잔틴 제국의 로마군을 밀어내는 데에 성공하였고, 그와 함께 수도를 세르디카로옮겨 이름을 ‘소비’(현재 소피아, '사비'의 변형으로 추정) 성을 쌓고 조상신 ‘단군’에게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사비’는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칸이 수도를 ‘소비’라고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불가리아 황제 크룸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으로 사망하는데, 이로 인하여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국은 11세기들어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하락하였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지배층이던 소수 민족이 피지배층이던 다수 민족에게 밀려 희석화되는현상을 우리는 중국의 역사를 통해서 자주 접했다. 바로 그런 일이 불가리아 제국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임이 확실하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때문이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신용하 교수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동방의 ‘부여족’임을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