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궁예는 어떤 인물인가?
우리는 이미 '의자왕과 3천 궁녀' 그리고 '삼국시대인가? 오국시대인가?' 등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는 진실이 아닌 승자 입장의 사실에 의해 기록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번에 들려드릴 이야기 역시 그와 연관된 이야기가 되겠다. 멸망한 고구려를 재건하겠다는 기치를 내걸었으나 왕건에게 쫓겨나 결국 비참하게 죽은 궁예. <태조 왕건>이란 드라마가 워낙 유명하여 궁예 하면 배우 김영철이 '관심법으로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워 살해하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궁예는 정말 그렇게 폭군이었을까?
KBS 드라마 <태조 왕건> 포스터
우선 궁예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궁예에 대해 확실한 출생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몰락한 왕족 혹은 진골의 후예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태어났을 때 '나라에 이롭지 못하니 기르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는 일관(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관원)의 예언 때문에 죽이려 했으나 명령을 받은 사람이 차마 그러지 못하고 아이를 창밖으로 던졌는데 받기로 했던 유모가 실수로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한다.
유모가 궁예를 안고 도망쳐 한 마을에 정착하여 정성껏 돌보았으나 타고난 기질과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던 탓인지 궁예는 사고뭉치였다고 한다. 결국, 유모는 궁예가 10살이 되었을 때 그를 꾸중하며 탄생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궁예는 크게 슬퍼하며 집을 뛰쳐나가 헤메다가 세달사(영월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선종이란 법명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기질은 승려로 만족하며 살 수 없게 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재를 올리러 가는 길, 까마귀가 점치는 산가지를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릿대에 떨어뜨렸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않고, 적이 자부심을 품고만 살았다.
이런 궁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진성여왕 5년(891)의 상황은 혼란하여 귀족들은 패가 갈렸고, 도적과 반란군이 들끓었다. 절을 나온 그는 처음에는 기훤이란 인물 밑으로 들어갔으나 이내 양길이란 인물에게 가서 군사를 이끌게 되었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3년 만에 3천 500여 명을 이끌게 되는데, <삼국사기>에선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점차 자신의 세력을 늘리던 궁예는 태백산을 넘어 철원으로 거점을 옮겼으며, 이때 왕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왕건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전과를 올리자 개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다. 그러나 양길과 경쟁체계가 되자 양길을 먼저 공격하여 제거하였고,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며 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잇단 성공이 독이 되었을까? 궁예는 왕인 동시에 스스로 미륵불이 되기로 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부르며, 머리에 금빛 고깔을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다. 맏아들을 청광보살이라 하고, 막내아들을 신광보살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탔는데,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동녀들을 시켜 일산과 향과 꽃을 받쳐 들고 앞을 인도하게 하였다. 또 비구 2백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면서 뒤따르게 하였다.
<삼국사기>
가족에게 버림받아 유모의 손에서 자라던 애꾸눈 소년이 마침내 왕을 넘어 신(부처)의 영역에 이르게 된 것이다.
904년 그는 후고구려 건국 3년 만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신라를 멸도(멸할 도시)라 부르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을 모두 죽이기 시작한다. 911년에는 나라 이름을 다시 태봉으로 고치며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이런 그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관심법이란 이상한 핑계로 신하들을 죽여대니 시하는 물론 백성들의 마음마저 멀어졌으며, 자신 자랑만 늘어놓는 불경 20권을 쓰자 석총이란 승려가 반발하자 그를 죽이며 자신의 지지기반인 승려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또한, 915년에는 부인 강씨가 그가 이상한 법술에만 몰두하는 것에 간언하였다가 강씨는 물론 두 아들마저 죽여 가족과도 멀어졌다.
결국,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가 혁명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궁궐 앞에서 왕건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1만여 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들의 혁명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왕좌에서 쫓겨난 궁예는 누추한 차림으로 산속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지만, 그를 알아본 백성들에게 돌을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본인의 정신 이상자와 같은 성격으로 인해 폭군이 되어 결국 부하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빌미를 주어 자멸한 궁예가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는 궁예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궁예를 다른 관점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이 사람들은 궁예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다음 시간에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