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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Jun 08. 2022

궁예는 억울하다. 2

2. 궁예는 정말 폭군이었나?

2. 궁예는 정말 폭군이었나?


1) 궁예와 관련된 전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궁예는 896~898년 사이에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904년엔 다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로 바꾼다. 1년 뒤인 905년 다시 도읍을 풍청원 들판(현재의 철원과 평강 사이-비무장지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로 옮겼으며, 911년엔 국호를 태봉으로 다시 바꾼다.

이때, 풍천원 들판에다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끌려온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했을뿐만 아니라, 지지세력들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청주 지역 출신의 인물들을 너무 편애하게 된다. 결국, 경기 북부 호족들이 반기를 들고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을 앞세워 918년 궁예를 몰아낸다.

훗날 궁예가 왕건의 군사에게 쫓겨 진을 친 곳이 명성산이다. 이때 궁예가 이 산에서 철원쪽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여 ‘울음산’으로 불리었고, 궁예가 강변에서 한탄했다 하여 ‘한탄강’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명성산 - 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탄강- 사진출처: 나무위키


궁예와 명성산이 관련된 전설은 그밖에도 매우 많이 전해진다. 산정호수 옆 두 개의 봉우리는 궁예가 올라가 망을 보았다는 곳이고, 등룡폭포 위 샘터 이름이 '궁예약수', 자인사에서 궁예가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 정상에서 강포리쪽으로 이어지는 '궁예능선'은 왕건의 공격을 피해 항거하며 쌓았다는 성터와 궁예가 숨었었다는 '궁예왕굴' 등이 남아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궁예봉'도 남아 있다.


                                               궁예약수 - 사진 출처: 포천일보

                                     궁예봉 - 사진출처: 다음블로그 수헌의 산이야기


고려사에는 ‘궁예가 평강과 안변 사이 험준한 지형인 삼방협으로 도망을 갔을 때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끓여 먹다가 평강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 지방 주민들로부터 전해지는 전설에는 ‘궁예가 삼방협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중이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 이런 협곡에 들어와 살아남겠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하자 궁예는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말하고 높은 곳에서 의연하게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도인 청구도에는 삼방협 위치에 궁왕묘(弓王墓)가 그려져 있다. 또 1924년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에는 궁예왕의 무덤 흔적을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궁예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


월정역 인근 비무장 지대에는 궁예의 꿈이 서려 있는 성터 궁예도성이 자리잡고 있다. 자연 지형을 이용한 토축과 석축을 혼합한 형태로 총둘레 12.7km에 이르는 성터가 드문드문 남아 있다. 

해방 전 이곳에 살던 주민들 중 논,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던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성 안에 궁궐동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돌로 쌓은 석축이 있었다고 한다.

비무장 지대가 아니더라도 철원에서는 궁예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궁예와 부하들이 왕건에게 쫓겨난 것이 서러워 통곡했다는 '명성산',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 간 골짜기라는 '한잔모텡이', 궁예의 최후 격전지인 '보개산성', 군사들이 한탄을 하며 쫓겨났다는 군탄리, 궁예가 피신했다는 명성산의 '개적동굴', 궁예가 건너면서 한탄했다는 '한탄강' 등등의 전설을 종합해 보면, 궁예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왕건과 싸우다 남쪽으로 후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개산성(보가산성지) - 사진출처: 철원신문


이렇듯 철원의 산과 들의 지명에는 이렇게 궁예와 관계가 깊고 대부분이 왕건에게 쫓겨 도망가는 궁예의 최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궁예는 한순간에 왕건에게 쫓겨나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니라 왕건의 반란에 맞서 오랫동안 전투를 치루었던 것이다. 게다가 궁예가 농민에게 돌에 맞아 죽는 비참하고 비루한 최후를 맞았다면 그 지역 주민들이 궁예와 관련된 이름을 지닌 곳들을 그대로 유지했을리가 없다. 

인근 운천에 있는 명성산(鳴聲山)은 일명 울음산이라고 하는데,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산새들이 슬퍼하며 울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새가 슬피 우는 소리는 결국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슬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궁예가 과대망상증에 걸린 폭군이였다면 민초들이 슬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왕건과 마지막까지 항전을 하는 과정에서도 철원과 포천 인근 산중턱 곳곳에 성을 쌓으며 2년 동안 대항을 했는데 많은 이때, 민중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렇듯 궁예가 죽을때까지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왕권과 격렬한 전투끝에 사망했을 것이다.

918년 여름, 보리 이삭이 막 패기 시작할 무렵 강원도 평강의 한 농가에서 궁예가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가 농민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고 역사(고려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전설을 기록한 '풍악기유'에 따르면 '궁예는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설움을 견디지 못한 채 천명을 알고 이에 순응해 자결한 의군'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쯤되면 우리가 역사서를 통해 알고 있던 궁예의 모습과 지역민들에게 전해지는 궁예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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