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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Jun 10. 2022

궁예는 억울하다.3

3. 슬픈 궁예

3. 슬픈 궁예


이재범 전 경기대부총장은 <슬픈 궁예>란 책을 통해 궁예의 억울함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궁예의 포악함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정사엔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고구려계 호족들의 조직적인 결탁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으로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


1) 부처가 된 궁예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석총을 죽이는 모습을 통해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었지만,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대입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시 종교는 강력한 왕권을 돕는 주요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그런데 궁예의 기반이 되었던 교종은 점차 쇠락하는 와중이었고, 지방에서 시작된 선종이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선종은 지방 호족들과 그 관계가 이미 끈끈하였기 때문에 중앙집권의 전제 왕권을 목표로 했던 궁예와는 결코 한 배에 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출처: KBS <태조 왕건>

당시 석총은 법상종(선종의 일파)의 대표적인 승려였고, 이미 왕건을 지지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궁예를 비난했기에 궁예로써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며 승복을 입고 국정을 돌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당시 불교는 왕권강화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 역시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 칭하며 승복을 입고 국정을 처리했다. 백제의 성왕이나 발해의 문왕도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칭했다. '전륜성왕' 역시 '미륵불'처럼 이상적인 제왕이며 부처의 한 존재이다.

그런데 왜 유독 궁예만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되었을까? 그것은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왕건 측이 벌인 일종의 작업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쓰이는 것은 당연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 기존 정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1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져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비정한 궁예


자신의 아내 강씨와 두 아들을 죽인 사건은 궁예의 정신이상설에 방점을 찍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아내는 물론 두 아들까지 죽인 사람인 정상일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궁예가 그래야 했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철원 지역에서는 궁예의 아내가 원래 구미호였는데 왕건의 사주를 받아 궁예의 아내가 되었다는 허황된 전설도 전해지고 있으며, 궁예를 뛰어넘을 정도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낸 왕건과 정을 통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논외로 처리하기로 하자.

                                                        출처: KBS <태조 왕건>

가장 그럴싸한 주장은 부인 강씨가 왕건, 혹은 호족 세력의 지원으로 궁예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던 왕건과 호족 세력은 정치적으로 궁예를 코너에 몰아넣을 만큼 강대해져갔다. 그리고 그 와중에 부인 강씨가 일종의 스파이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반역죄로 그녀와 아들들까지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배후세력이었던 왕건과 호족 세력을 치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역모에 대한 죄를 강씨 부인과 아들들이 뒤집어 쓰고 죽었다는 것이 가장 현실성 있는 학설 중 하나이다.


3) 변덕스러운 궁예


18년 동안의 재위 기간 동안 후고구려에서 마진으로, 마진에서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연호 역시 4차례나 바꾼 변덕스러움 역시 궁예를 정신이상자로 격하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개 승려에 불과했던 궁예가 지방의 호족 세력들을 규합하며 나라를 세우고 이끌어 가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새로운 지역의 거대 호족 세력을 규합하고 품에 안기 위해 도읍을 옮기거나, 연호를 바꾼다거나, 국호를 바꾸는 식으로 꾸준히 변화했기에 궁예는 강대한 호족 세력들을 규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양길의 휘하에서 힘을 키워 스스로 양길을 몰아내었기에 호족들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호족도 아니고 몰락해가는 교종의 지원 밖에 없었기에 그들을 품에 안고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후 고려의 태조가 된 왕건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은 스스로가 송악의 호족 출신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금수저 집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왕건조차도 고려를 이끌어가면서 지방 호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29명의 부인을 두어야 했다. 쉽게 말해 어느 정도 힘이 있어서 자신을 위협할 정도다 생각되면 바로 장인어른과 사위의 관계로 묶어 버린 것이다. 

금수저 호족 출신인 왕건이 이러했는데, 오직 혼자뿐이었던 궁예는 얼마나 깊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쯤되면 궁예가 실제로 정신병에 걸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서 겨우 벗어나 자신을 키워주던 유모에게 사실을 전해 듣고 승려가 되었다가, 지방 호족 세력의 밑에 들어가 스스로 힘을 키워 호족들을 규합하고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호족들이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알게 되어 나라를 이끌어가는 한편 그들을 다독여야 했으니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궁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는 오늘도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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