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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Jul 28. 2022

우리 역사 속의 범죄자들.1.순화군

1.조선을 대표하는 사이코패스, 순화군

요즘 TV에서는 과거의 사건사고를 재조명하는 프로그램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알쓸범잡>, <용감한 형사들>, <블랙: 악마를 보았다>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도 약 10년 전인 2012년 '21세기북스'에서 전자책 형태로 <역사 속 범죄파일: 우리 곁에 숨어있는 야수들>이란 책을 발행한 적이 있다. 당시엔 아직 자료 취합이나 문장의 선택이 많이 미숙했기에(물론 현재도 그러하다) 아쉬운 점이 많이 남는다.


        출처: 21세기북스


그 내용의 번복은 10년 전의 나에게도 현재 출판권을 지니고 있는 21세기북스에게도 해서는 안될 일이기 때문에 그저 당시 내가 썼던 목차에 따라 다시 한번 그때 다루었던 인물들에 대한 조금 더 정밀한 접근을 해볼까 한다.


첫주자는 바로 조선을 대표하는 사이코패스 순화군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 역사에서 암군으로 손꼽히는 인물들이 몇명 있는데, 대표적인 이들이 인조, 선조, 고종 되시겠다. 이중 고종은 논란거리가 많기는 한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선조를 가장 암군이라 손꼽는다.


인조 역시 늦둥이인 효명옹주에 대한 지나친 애정으로 역모를 일으키는 불효녀를 만들어 내긴 했지만 결국에는 아예 유배를 보내 비참한 말로를 맞게했다. 그러나 선조는 사이코패스가 분명한 자신의 아들을 끝내 방치하고 옹호했기 때문에 선조야말로 진정한 암군이라 할 것이다. 이 사이코패스가 바로 선조의 6번째 아들인 순화군이다. 순하고 온화하다는(順和君) 명칭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드러냈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성장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는 동물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커가면서 강간이나 상해 등의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다가 마침내 살인과 방화라는 끔찍한 행위로 만족을 얻는다고 한다.


순화군이 바로 이 전형적인 성장 과정을 거쳤다. 사실 이복 형제인 임해군이나 정원군 역시 패악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순화군은 그야말로 발군의 또라이였다고 전해진다. 



왕자의 무리들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을 침탈하여 소란을 피웠고, 때문에 인심을 크게 잃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남인 임해군과 함께 회령에 주둔했는데, 자신이 왕자임을 내세우며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렸고, 결국 이에 눈이 뒤집힌 국세필이 그 지역민들과 단합하여 두 왕자를 포박하여 일본의 가토 가요마사에게 넘겨버린다. 이때 순화군의 나이 불과 13살이었다. 


결국, 1년 정도 포로 생활을 하던 두 사람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이후로는 성격이 더 잔인하고 포악해졌다. 황해도 신계에 머물던 15세 전후에는 그곳 주민들에게 시비를 걸고, 하루에도 여러 명에게 곤장을 때렸고, 1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살인을 시작한다. 당시 북파의 영수이던 이이첨이 선조에게 권하여 삭탈관직이 되었으나 순해군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 죽이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순화군은 일 년에 10명 정도의 사람들을 아무 이유없이 죽였다고 한다.


40여 명을 죽이고도 아버지인 선조 덕분에 무사하던 순화군은 마침내 아버지의 뒷통수를 거하게 때리고야 만다. 바로 선조의 아내였던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서 장례를 치르던 중에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의인왕후의 관이 모셔져있던 빈전 옆의 막사에서 강간한 것이다. 당시 궁녀란 모두가 왕의 여자였기에 순해군이 한 행위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여자를 어머니의 시신 옆에서 강간한 것'이었다. 참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패륜의 끝판왕인 것이다. 결국 선조도 순화군의 처벌을 지시한다.



"순화군(順和君) 이보(李�)가 어려서부터 성질이 괴팍하여 내 이미 그가 사람 노릇을 못 할 줄 알아 마음 속으로 항상 걱정하였는데 성장하자 그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었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살인을 하였으나 부자간의 정의로 아비가 자식을 위해 숨기며 은혜가 의리를 덮어야 하기 때문에 그때 나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유사(有司)의 조처에 맡겨두고서 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그 후 대사령으로 인하여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나 패악한 행동은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오늘 빈전(殯殿)의 곁 여막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궁녀)를 겁간하였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내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겠으나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군하(群下)를 볼 면목이 없다. 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

                                                                                            <선조실록 127권> 1600년 7월 16일



그러나 막상 곤장 80대와 유배형이 결정되자 선조는 다시 명을 내려 곤장 80를 빼고 유배만 보내도록 명령한다. 결국, 순화군은 역사에 다시 없을 패륜을 저지르고도 몸성히 수원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아버지의 옹호 속에서 더 무서울 것이 없었던 순화군은 유배지인 수원에서도 죄인인 자신이 오히려 향리들을 패고 고문하여 수원부의 관리들이 도망을 쳐 행정이 마비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죄인들을 다스리는 의금부의 금부도사가 나서서 순화군을 위리안치(가택연금) 시키려 했지만 담장을 쌓는 인부들을 공격하고, 잠긴 문을 부수고 나와 다시 백성들을 두드려팼다.


결국, 당시 수원부사였던 최산립이 도망치듯 떠나고 권경우가 부임해 왔는데, 순해군은 그가 자신에게 인사를 오지 않았다며 칼을 들고 찾아가 협박을 했다. 결국 권경우 역시 업무를 돌볼 수가 없어서 수원부사 자리에서 짤리게 된다. 


그밖에도 여러 패악질을 부렸는데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며 채소밭을 담당하던 종 임동과 숙모를 잡아다 몽둥이로 20대를 때렸다.

수원 읍성에 살던 김영수가 궁궐에 일을 하러 가자 또다시 잡아다 몽둥이로 패고 옷을 모두 찢어 버렸다.

자신의 밥상에 쇠고기와 생선이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창고를 관리하던 종 어리손의 집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버렸다.

화공 정업수를 잡아다 이유없이 몽둥이로 40여 대를 때렸다.

술을 가지고 온 원금을 이유없이 구타하였고, 마찬가지로 술을 가져온 계집종 주질재의 옷을 전부 벗기고 결박하여 이튿날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읍내에 사는 정석을시(정돌쇠) 집에 역병이 들어 역신을 쫓기위해 맹인 윤화와 부인 맹무녀가 굿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순화군이 난입하여 무녀의 위아래 이빨을 1개씩, 정석을시의 이빨을 9개 쇠망치로 깨부수고 집게로 잡아 빼서 무녀는 그날로 죽고, 정석을시는 이튿날 죽었다.

                                                                                                       <선조실록> 134권. 1601년



상황이 이리 되자 수원성의 사람들은 수원을 떠나기 시작했고, 수원이란 고을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결국, 선조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순화군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여 위리안치 시키는데 여기서도 순화군은 번번히 담을 허물고 나가 사람들을 해쳤고, 아예 무뢰배들을 모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사람들을 잡아다 죽였다.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딱 한 줄만 등장하는데 실은 두 명의 여자를 잡아다가 아주 잔인하게 죽인 것이라고 한다.



순화군 이보(李�)가 사람을 죽였다.

                                                                                                     <선조실록>  174권. 1604년



마침내 선조도 금위군 군사들로 하여 순해군을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며 강제로 가택연금을 실시하였다. 그러자 이 성격은 안으로 터져 풍에 걸리게 되는데, 이 와중에도 하인들을 시켜 외숙부인 김언희를 잡아가 구타하고 가두는 등의 패륜을 저지른다.



"사비(私婢) 천개(天介)가 본부에 소장을 받치기를

 ‘남편 김언희(金彦希)는 바로 순화군의 삼촌인데 순화군이 결박지어 잡아가서 무수히 구타한 다음 여러날 동안 수금하였는데 사망할 것이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중략)

순화군 이보(李�)는 풍병(風病)을 앓은지 이미 오래이므로 진실로 책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가 거느린 하인들이 그의 망령된 말을 듣고 일가의 친속을 수금하기까지 하였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금하고 통렬히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사관은 논한다.

자기의 숙부를 수금하고 장(杖)을 쳤으니 너무도 윤리에 어긋난 짓이다.

그의 종만 다스리기를 청한 것은 이미 근본을 다스린다는 논리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다른 궁가(宮家)에서 죄없는 사람을 멋대로 잡아다 가둔 것이 한없이 많은 것을 말해 뭐하겠는가.

                                                                                                       <선조실록> 200권. 1606년



결국, 1607년 순화군은 28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 최고의 암군 선조의 피를 이은 왕자 순화군은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을 뿐 아니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패악과 패륜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병으로 죽음을 맞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이 있다. 선조는 스스로의 몸와 마음을 갈고 닦지도 못했으며, 집안의 망나니들을 방조했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도 제 한몸 챙기기에 급급하여 혼란을 가중하였으니 4가지 덕목 중 하나도 지키지 못한 암군이다. 아들의 잘못은 결국 아비에게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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