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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Aug 01. 2022

우리 역사 속의 범죄자들.2.이판능

2.1시간에 17명을 살해한 이판능

지난 3월 10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박열과 그 당시 일어난 관동대지진이라는 재앙의 희생양으로 재일조선인들 6천6백여 명(최소)을 바친 일을 소개했다. 일본이라는 나라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최하층민으로 살아가던 조선인들이 그들의 희생양이 된 것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느꼈던 공포 혹은 두려움 때문이라는 이야기들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하층노동자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다. 자본도 기술도 배경도 없는 이들은 당연하게도 일본의 밑바닥을 이루게 된다.


이판능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아니 도쿄의 전차국 기사(차장)으로 일했으니 최하층민보다는 조금 나았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있던 그는 먹고살기 위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나름대로 건실한 삶을 살고 있었고, 회사 내에서의 평도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그날, 그는 이성을 잃고 1시간 동안 17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이는 대량살인마가 되어 일본과 조선의 신문을 장식한다.



1921년 6월 2일, 일본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이판능은 자신의 수건 3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지금이야 수건 따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옷 한벌 사입는 것도 힘들었던 당시 하층민들에게 수건은 무척이나 귀한 물건이었다.


이판능은 의심스럽던 하숙집 주인을 찾아가 "내 수건이 없어졌다. 수건을 보지 못했냐?"고 따졌다. 그러나 이 하숙집 주인은 도리어 화를 내며 부인과 함께 이판능을 폭행한다. 화가난 이판능은 경찰서를 찾아가 이 사실을 고발하지만 일본인 경찰은 당연히 하숙집 주인인 일본인 부부의 편을 들며 무시만 했다.


이때 이판능은 이성을 잃고 분노의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자신에겐 소중한 수건 3장이 도둑맞은 것도 화가 나는데, 의심스러운 하숙집 주인 부부에게는 폭행을 당하고, 경찰은 그런 도둑놈들을 오히려 옹호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하숙집에 돌아온 그는 부엌으로 가서 식칼을 들고 나와 주인집 부부을 칼로 살해한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는 거리로 뛰쳐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찌르는 데 그때 죽은 사람이 모두 17명이었다. 그중에는 물론 일본인들이 많았지만 지나가던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건 세 개를 훔쳐 갔기에 도로 달라 했더니 되레 저를 구타하고 그 처까지 저를 때렸는데 이 말을 경찰서에 고소해봐야 저는 조선 사람인고로 돌아보지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불공평한 경찰에 고소한대야 쓸데없겠으니 드디어 죽일 마음을 내었습니다.

                                                                                                 - 〈동아일보〉 1921년 10월6일


그가 저지른 범죄는 끔찍한 것이었지만 당시 여론은 그의 상황을 동정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그와 같은 극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판능은 꽤 정당한(?) 조건에서 판결을 받을 수 있었고, 일본인 변호사는 '당시 이판능은 정신착란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므로 죄가 없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재판부는 이 의견을 받아들여 도쿄국제대학 의사들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하였고, 4개월 뒤 감정결과가 나왔다. 


'집주인을 살해할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으나, 길거리로 나가 추가적인 살인을 할 때는 심각하지는 않지만 정신 착란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1심에서는 무기징역을 받은 이판능은 2심에서 7년 6개월이라는 파격적인 선고를 받는다. 당시 조선인들의 여론이 들끓긴 했지만 일본 재판정이 그것을 의식하지는 않았을테니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이며 나름 공정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일본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만 하면 '제2의 이판능 사건', '제3의 이판능' 등의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 내에서 조선인의 이미지는 잔인한 살인자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다. 그리고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인 유학생이 친일파였던 민원식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사회의 규범을 무너뜨리는 조선인'에 대해 일본인들은 편견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2년 뒤인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쏟아져나오는 일본인들의 불만을 쏟아낼 적당하고 만만한 대상을 지정해 준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공격한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등의 말도 안되는 루머를 정부에서 반포한 것이다.


물론 이판능 때문에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6천6백명 이상이 죽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비약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조선인에 대한 혐오를 뿌리내리게 만드는 데에 이판능이 일조를 했다는 것 역시 사실일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도 이와 같은 사건들(오원춘을 비롯한 각종 조선족이 벌인)로 인해 조선족에 대한 혐오가 만연해 있듯이 말이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 어떤 재난이 일어난다고 해서 정부차원에서 조선족을 희생양으로 삼기위해 유언비어를 날조하거나 수천명의 사람들을 죽일 리는 없겠지만 이판능이 당시 일본 사회에 조선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준 인물임에는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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